아리랑은 고개를 넘는 노래다. 그러나 그 고개는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을 떠나는 이별의 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난을 견디는 생존의 길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억압을 넘어서는 저항의 길이었다. 아리랑은 그렇게 민중의 삶을 품으며 이어져 왔다.필자는 앞서 「모든 아리랑은 문경새재를 넘었다」(본보2026년8월27일)를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전국의 모든 아리랑이 실제로 그 고개를 통과했다는 뜻이 아니다. 문경새재가 사람과 물자, 노래와 정서가 오가던 문화적 관문이었다는 의미다. 그 연장선에서 주목할 노래가 상주아리랑이다.상주는 상락(上洛)이라는 옛 지명을 지닌 영남 내륙의 중심지다. 고려시대 상주목(尙州牧)의 관할에는 문경 일대도 포함되었다. 행정구역은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는 경계로 단절되지 않았다. 문경새재를 오가는 길과 낙동강 유역의 농경문화 속에서 두 지역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상주아리랑의 흔적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924년 엄필진의 『조선동요집』에는 상주지역 목동들이 부르던 아리랑 계열의 노래가 소개되어 있다. 1930년 『매일신보』에도 관련 사설이 실렸으며, 민요 연구자 이재욱은 같은 해 상주에서 아리랑을 채록했다. 훗날 연구자들이 '상주시리랑'으로 이름 붙인 이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아리아리랑 시리시리시리랑 / 문경아새재는 언(님)고갠가 구부야구부야 눈물일세.”문경새재를 노래한 사설이 상주에서 채록되었다는 사실은 두 지역의 문화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노래의 발생지나 전파 방향을 단정할 수는 없다. 옛 상주시리랑은 일부 사설만 전하며, 독자적인 가창 전통은 단절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오늘날 널리 알려진 상주아리랑은 명창 김소희의 가창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진 노래다. 그 사설에는 일제강점기 이주민의 애환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담겨 있다.“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아버지 어머니 어서 와요 / 간도 벌판이 좋답디다.”봇짐은 단순한 여행 짐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단한 현실을 상징한다. 다만 이러한 사설이 특정 이주 사건에서 직접 비롯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노랫말에는 이별의 슬픔과 살아남으려는 희망이 함께 흐른다.“문전에 옥토는 어찌되고 /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고.”“말께나 하는 놈은 재판소 가고 / 일께나 하는 놈은 공동산 간다.”이 구절에는 삶의 기반을 잃은 농민의 탄식과 억압받는 민중의 분노가 서려 있다. 상주아리랑이 단순한 이별의 노래를 넘어 저항과 생존의 노래로 읽히는 이유다. 상주 아리랑고개에 전하는 농민군의 비극 역시 지역의 집단기억과 연결되지만, 구술 전승과 확인된 역사적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음악적으로도 김소희 가창본은 독특하다. 세마치장단과 엇모리장단이 교차하고, 남도 육자배기조와 영남 메나리조의 특징이 함께 나타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가 어우러진 점은 상주아리랑의 또 다른 특색이다. 이 노래는 '통일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소개되어 왔으나, 그 명칭만으로 노래의 본래 발생 목적을 단정할 수는 없다.이제 상주아리랑의 계승은 공연과 축제를 넘어야 한다. 옛 사설과 선율의 조사, 지역민의 구술 채록, 상주농요와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상주와 문경 역시 노래의 소유권을 다투기보다 서로 얽힌 전승의 역사를 함께 밝히고 계승해야 한다.문경새재가 아리랑이 넘나들던 문화적 길이었다면, 상주는 그 노래가 지역민의 삶 속에서 울려 퍼진 터전이었다. 고개는 넘어도 삶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주아리랑은 이별과 저항을 넘어 다시 살아가려 했던 민중의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