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셔도 잠은 잘 자는 체질이라고 자부해 왔습니다. 저녁 식후에 한 잔을 마셔도 자리에 누우면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신 날은 잠이 들기는 하지만 밤새 얕은 잠을 오가다 깬 듯하고, 아침이면 몸이 무겁습니다. 나이 탓이려니,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기던 차에 카페인과 수면 뇌파를 다룬 연구들을 접했습니다. 막연하던 체감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깨어 활동하는 동안 뇌세포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 부산물로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이 쌓입니다. 아데노신이 신경세포의 수용체에 결합하면 졸음이 옵니다. 오래 깨어 있을수록 졸리고, 자고 나면 개운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카페인은 아데노신과 구조가 비슷해 수용체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만, 졸음 신호는 전달하지 않습니다.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피로를 알리는 초인종의 전선을 잠시 끊어 두는 셈입니다. 커피를 마시면 잠들기 어렵다는 것은 오래된 상식이었고, 저 역시 잠만 잘 들면 문제없다고 여겼습니다.
최근 지난 50년간 사람을 대상으로 카페인과 수면 뇌파를 살핀 연구 32편을 종합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험 방법은 제각각이었지만 결론은 거의 같았습니다.
카페인을 섭취하면 깊은 잠에서 나타나는 크고 느린 뇌파, 즉 서파가 줄어듭니다. 잠이 가장 깊어야 할 수면 초반에 특히 뚜렷했고, 커피 한 잔에 해당하는 100밀리그램으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서파가 줄어든 대신 각성 상태에서 나타나는 빠른 뇌파는 늘었습니다. 몸은 잠들었어도 뇌의 일부는 깨어 있었던 셈입니다.
주목할 점은 따로 있습니다. 총수면시간이나 수면 단계 비율 같은 기존 지표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뇌파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잠의 깊이가 달라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느끼는 수면의 질과 객관적인 변화 사이에도 괴리가 있었습니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각성 효과를 느끼는 데에는 내성이 생기지만, 잠든 뇌의 변화에는 내성이 덜 생긴다고 합니다. 커피를 마셔도 잘 잔다는 제 믿음은 잠드는 데 지장이 없다는 뜻이었을 뿐, 깊이 잤다는 뜻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병리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겉보기에 멀쩡한 조직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를 현미경으로 발견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증상이 없다고 병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그 차이를 자각하게 되었을까요. 나이가 들면 깊은 잠의 양 자체가 줄어듭니다. 중년은 젊은 사람보다 서파가 적지만, 카페인이 서파를 줄이는 폭은 연령에 관계없이 비슷했습니다. 남은 깊은 잠이 적은 상태에서 같은 몫을 덜어 내니, 예전에는 몰랐던 빈자리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침 커피라고 안심할 일도 아닙니다. 아침에 200밀리그램을 마시고 16시간 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그날 밤 서파가 줄어 있었습니다. 400밀리그램을 취침 6시간 전에 마셨을 때는 깊은 잠이 30퍼센트 넘게 줄었습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커피 한 잔은 취침 9시간 전쯤까지 마셔야 수면 시간이 줄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밤 11시에 잠자리에 든다면 오후 2시가 마지막 커피 시각입니다.
커피를 끊자는 말이 아닙니다. 낮에 마시는 커피 덕분에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낮의 이득을 밤에 대가로 치르지 않도록 섭취 시각을 정해 두자는 것입니다. 저녁 커피를 마신 다음 날 아침이 무겁다면, 2주만 오후 커피를 끊고 아침의 몸 상태를 비교해 보십시오. 잘 잤다는 느낌만으로는 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커피잔을 몇 시에 내려놓느냐에 따라 그날 밤 잠의 깊이가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