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밤이면 오래된 기억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창밖 어둠은 낡은 책장이 되고, 빗방울은 지워진 세월의 문장을 다시 적어 내려간다. 살아온 날들은 어디로 갔으며, 이루지 못한 꿈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천백여 년 전 한 시인이 남긴 스무 글자 한시가 빗소리를 타고 가슴 깊이 스며든다.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추풍유고음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창외삼경우 등전만리심) -최치원 가을바람에 괴로이 시를 읊조리지만 내 마음 알아주는 이 드물고, 창밖에는 삼경의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 마음은 만 리 밖을 헤맨다. 신라 말 문장가 고운 최치원의 「추야우중」이다. 짧은 시 안에는 이상과 좌절, 타향의 고독과 귀향에 대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과거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을 높였지만, 학문적 성취가 삶의 충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상은 넓었으나 마음 둘 곳은 좁았다.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은 친구가 없다는 탄식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드물다는 존재론적 고백이다. 지음(知音)은 백아와 종자기 고사에서 유래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그 선율에 담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의 뜻을 알아들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지음이란 말하지 못한 마음 결까지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진정한 지음을 얻기는 어렵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고독할 수 있고,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적막을 견딜 수 있다.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보다 자신의 내면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더욱 깊어진다.
최치원은 귀국 후 신라 사회 모순을 개혁하려 했으나 골품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뜻을 펼치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욕망과 결핍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치원의 고독은 단순한 욕망의 좌절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공자의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곧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의 태도를 떠올리지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의 비는 무엇인가. 세상 소음이 멎으면 마음속 소음은 오히려 커진다. 빗방울은 창밖에 떨어지지만 파문은 내면으로 번진다. 작은 등불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정신은 만 리 밖을 떠돈다. 바슐라르가 공간을 기억과 상상력의 세계로 바라보았듯, 최치원의 등불 앞은 육체가 머물고 정신이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이다.
필자 역시 등불 앞에서 만 리 밖을 헤매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글을 쓰고 문학과 시를 공부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사유보다 무거웠다.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고, 가난과 상실 앞에서 철학은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 창작을 멈추지 않은 것은 고통을 언어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진 기억을 시어로 불러 모아 견디기 어려웠던 시간에 작은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문학이 허락한 위안이었다.
시니어가 된 지금, “만리심”은 새롭게 다가온다. 한때 만 리에 도달하지 못한 미래였다면 이제는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는 정신적 거리 “만리심”이다. 새벽에 눈 뜨고, 누군가와 따뜻한 밥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 안부를 묻고, 석양 노을을 바라보는 일. 작은 관계를 지키는 일에도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이상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높이를 깊이로 바꾸려는 것이다. 세상에 무엇인가를 증명하기보다 누군가 고통을 이해하고 경험을 나누려 한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누군가의 지음이 되는 일이다. 가을밤은 깊어 가고 창밖에 비가 내린다. 천 년 전 최치원이 들었던 빗소리와 오늘 빗소리는 다르지만 고독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독을 원망으로 남길 것인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꿀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최치원의 등불은 꺼졌지만 만 리 마음은 아직 가을밤에 말을 걸어온다. 세월은 육체를 늙게 하지만 고통과 고독에서 태어난 진실한 문장은 쉽게 늙지 않는다. 오늘도 등불 앞에서 만 리 밖을 헤매던 마음을 거두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토록 멀리서 찾았던 삶의 대답은 처음부터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리를 떠돌던 마음이 마침내 돌아와 머무는 자리, 그곳이 평생 찾아 헤매던 지음의 세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