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 삼국유사 염촉멸신 조에 나온다. 신라 서라벌에 원숭이가 살았던가? 아니다. 극도의 슬픔을 원숭이의 울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라불교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흥법의 시대를 맞는다. '그의 목을 베니 흰젖이 한 길이나 솟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지가 진동하고 꽃비가 휘날렸다. 샘물이 마르고 물고기와 자라가 놀라 뛰어나오고 곧은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들이 떼지어 울었다' 일념스님이 817년 지었다는 촉향분례불결사문을 요약해 일연이 유사에 실었다.
멸신이라 표현한 이차돈의 죽음은 주위를 슬프게 했고 모두를 놀라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고 한 것은 슬픔을 언어가 아닌 천지조화와 짐승의 울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울음은 기쁨과 슬픔을 떠나 감정을 표현하는 비언어적 의사전달의 수단이다. 언어나 몸짓을 넘어 최후의 방법이 울음인 것이다.
슬픔의 정도를 인간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천지간의 자연에서 찾고 나아가 동물의 울음까지 끌어들여 감정을 대변한다면 공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두보는 등고라는 시에서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면 원숭이의 울음소리는처량하게 들린다'고 읊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원숭이 울음소리는 슬픔을 상징할 만큼 구슬프다"라 했다.
삼국유사에서 한반도에 없는 원숭이가 신라의 문장으로 드러남에 모두가 어리둥절한다.
이땅에 원숭이가 살았는가에 관심을 둘 뿐이다. 울음이 주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원숭이의 울음은 얼핏 괴성에 가깝다. 또 경기장 관중들의 야유의 소리와 닮았고 스위스의 요들송을 연상케 한다.
연구결과 원숭이는 인간에게는 퇴화되고 없는 성대막을 가졌기에 음역대가 높고 음역전환이 자유로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듣기에 괴성에 가까운 소리도 자유롭게 나온다는 것이다.
슬픔의 표현을 당사자의 대성통곡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하는 천지와 자연의 상태로까지 확장하면 더 이상의 묘사는 사족일 뿐이다. 때문에 염촉멸신의 순간에 임금이 비통해 하고 궁궐내의 동료들도 통곡을 했다는 내용조차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다.
또 872년 최하가 지은 대안사 적인선사 혜철의 비문에도 '임종할 무렵 들짐승이 슬피 울어 산과 골짜기가 흔들리고 갈가마귀 참새가 모여들어 모두 슬피 울었다'고 했다.
이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당사자의 슬픔이 아니라 자연과 천지의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슬픔의 정도를 극한으로 끌어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817년 지었다는 일념의 결사문은 오늘날의 용어로 보면 명백한 표절이다. 상기한 슬픔의 표현은 813년 김헌정이 지은 단속사 신행선사비문에 이미 나와 있다는 점이다. 김헌정은 당시 이찬으로 병부령 벼슬에 있으면서 779년 입적한 신행선사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서는 '샘물이 마르자 고기와 용이 놀라 뛰어나오고 곧은 나무가 부러지니 원숭이와 새가 그 아래서 슬피 울었다'고 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만물이 떨어졌다'는 표현도 상기와 같다.
선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문장이 4년후 일념에 의해 이차돈의 죽음에 인용된 것이다. 원숭이 울음소리가 슬픔을 상징한다지만 한밤중 풀숲에서 들려오는 짝을 찾는 산새소리도 슬픔을 머금고 있다.
한편 818년 이차돈의 순교비(석당비)가 건립되고 이시기를 전후로 흥륜사금당에 신라 10성의 소상이 모셔졌다. 이는 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가 다소 쇠퇴해질 무렵 흥륜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중흥 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