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고도 경주에서 찬란한 신라문화의 세계적 위상을 드높이고, 실크로드 연변의 여러 나라 관련 학술단체와의 학문적 유대를 강화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천년 신라의 존속과 번영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신라의 내재적, 외연적 세계성은 오로지 이 길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문제를 비롯해 이 길에서 오간 문물교류나 내왕에 관한 실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학술회의에는 실크로드의 요로에서 신라와 여러 가지로 만남과 소통을 이어온 중국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저명한 전문 연구자들이 참여해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의 제반 교류상에 관해 심도 있는 담론을 펼쳤다.
이와 관련 본 지면에서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의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세계의 만남에 대한 연구를 소개한다.
◆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
실크로드에 관한 연구는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동안 여러 가지 연구가 거듭되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이루어졌지만, 실크로드의 개념과 범주 등 일련의 근본문제에서조차도 이직까지 이론이 분분하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실크로드를 오아시스로 한 길로만 보거나, 구대륙(유라시아)에만 국한시키거나, 혹은 한반도를 실크로드에서 제외시키는 등 구태의연한 통념이다.
실크로드 연구에서 우리의 민족사 전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이 길의 한반도 연장문제다. 지금까지의 통념으로는 구대륙 내에서 전개된 실크로드 3대 간선의 東端은 일괄해서 중국이다. 즉 초원실크로드는 華北 지방이고, 오아시스실크로드는 長安이며, 해양실크로드는 중국 동남해안이다. 이로써 한반도는 실크로드에서 제외된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 안팎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서역이나 북방 유물 및 관련 기록들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그들 간에는 문물교류와 인적 내왕이 있었음을 실증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이러한 교류와 내왕을 실현 가능케 한 공간적 매체로서의 길이 있었을진대, 그것은 다름 아닌 중국을 관통했거나 아니면 에돈 실크로드의 동쪽 구간, 즉 한반도로 이어진 실크로드라는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이러한 주장이 통념의 두터운 벽을 꿰뚫고 차츰 공감의 불빛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실크로드가 일찍부터 신라로 이어졌으며, 이 길을 따라 신라가 세계와 만나고 소통하게 되었음을 조명하고, 신라와 세계의 만남은 신라 속의 세계, 즉 내재적 세계성과 세계 속의 신라, 외연적 세계성이란 두 좌표에서 확인될 것이다.
◆ 신라속의 세계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신라 속의 세계, 즉 신라의 내재적 세계성은 한민족의 원초적인 뿌리와 각종 유형 및 무형의 유물과 기록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한민족의 뿌리에 내재한 세계성은 남북방의 혈연적 및 문화적 상관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이칼을 중심으로 한 북방 초원지대에서 시원한 일군의 조상이 후기 구석기시대의 해빙기에 초원실크로드를 따라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길의 전개와 관련이 있는 부랴트인, 몽골인, 만주인, 한국인 등 동시베리아인들은 체질인류학적으로 몽골로이드 특유의 감마유전자인 ab3st를, 부랴트인, 아메리카 인디언, 한국인은 유전학적 지표인 Y염색체 DNA를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는 샤머니즘과 전개형前開型(카프탄) 복식, 수조獸祖 전설(부랴트는 순록, 몽골은 늑대, 한국은 곰), 솟대와 성황당, 적석목곽분 등 문화적 상관성도 줄곧 유지하고 있다.
경주를 비롯한 신라 고지에는 외래 유물이 가히‘지천에 깔려 있을’정도로 처처에서 발견된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요시미즈 쯔네오(由水常雄)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2002)라는 저서까지 펴냈겠는가. 천마총의 천마도(5~6C)와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725), 선덕대왕 신종의 비천상(771) 등에서 보이는‘천마’나‘비천’은 그리스-로마의 신화 속 영물이고, 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나‘미소짓는 상감옥’(일명‘인명유리구슬’), 그리고 80여 점의 유리그릇과 구슬 등은 4~5세기 지중해 연안에서 유행하던 다채장식 양식이나 후기 로만글라스에 속한 것이며, 가야와 신라에서 출토된 각배는 전형적인 헬레니즘의 공예로서 모두가 그리스-로마문화에서 전래된 것이다.
오늘날의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역 유물은 일찍부터 그 색다름으로 인해 주목을 끌어왔다.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이나 용강동 돌방무덤(8C 초)의 토용(28점)은 심목고비한 서역인의 형상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고, 황성동 돌방무덤(7C)에서 출토된 고깔모자를 쓴 심목고비한 인물은 중앙아시아 소그드인으로 판명된다. 토용 가운데는 고관대작의 징표인 홀을 잡은 인물도 있으니, 이는 이색을 마다하고 이방인을 고관에 기용하는 1300여년전 신라의 개방성과 수용성을 말해주고 있다. 진덕여왕 2년(648)에 사신으로 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김춘추를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차림으로 위장해 목숨으로 그를 고구려 순시병의 암살로부터 구해낸 시종 온군해가 바로 소그드인이라는 사실은 혈맹을 방불케 한다. 왕은 온군해를 대아찬으로 시봉하고, 자손에게는 상을 두터이 내렸다.
경북 칠곡군 송림사의 5층 전탑에서 발견(1959)된 녹색 사리병과 경주 본원사에서 출토(1966)된 입수쌍조석조유물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고유 문양인 환문과 대칭문, 연주문으로 장식됨으로써 그곳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1966) 유향이나 '삼국사기' 속의 안식향과 목숙(거여목)은 서역산 향료이거나 명마의 사료다. 그리고 신라에서 흥행하던 삼죽과 요고, 공후 등 악기는 서역에서 전래한 것이며, 최치원은 '향악잡영오수'(9C)에서 당시 서역에서 들어와 유행하던 다섯 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산예(사자춤)는 지금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신라 속의 세계를 증언하는 이러한 유형유물과 더불어 주로 정신문명의 유입을 보여주는 무형유물이나 기록도 오롯이 찾아볼 수 있다. 종교분야에서는 불교를 차체하고도 고대 동방기독교인 경교가 선을 보이고 있다.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1965)된 돌십자가(7~8C 초)와 경주 일원에서 발견된 성모 마리아상(7~8C) 등은 경교의 신라 전입을 강력히 시사해주며, 영주 왕유동분처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가능케 한다.
말도 많은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에 관해서는‘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有不知所從四人)’이란 '삼국사기' 원문에 준하면 비록 초면으로서 외형과 의건이 괴이하지만, 결코 정령이나 용자 따위는 아니고 도래한 자연인, 외방인이다. 그러한 외방인을 신라의 대표적 향가의 하나인‘처용설화’의 주인공으로 승화시킨 것은 신라의 수준 높은 수용성과 포용력을 말해준다.
◆세계속의 신라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세계의 만남은 신라 안에서의 만남만이 아니라, 밖에서의 만남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 외연적인 만남을 통해 신라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드높아졌다. 이러한 외연적인 만남은 우선, 세계문명과의 유대 속에서 구현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점을 소홀히 해왔다. 일례로 황금문화대를 들 수 있다. 사실 황금문화는 고차원의 문화로서 그 향유자는 유수일 수밖에 없다. 기원을 전후한 약 1천년 동안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에 황금문화대가 형성되었다. 신라는 세계 고대금관 10구 중 7구(가야 1구)를 보유함으로써 이 문화대의 동단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금관의 나라’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황금문화대 말고도 즐문토기문화대나 고인돌문화대, 벼문화대, 도자기문화대 등 일련의 문화대 속에서 세계문명과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외연적 만남을 이어왔다.
신라의 외연적 세계성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대해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과의 혈통과 언어, 풍습 등에서의 동족적 유대나 상관성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야의 자그마한 야마나박물관에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바로 한반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지도가 걸려 있으며, 곳곳에서 우리의 것과 닮은 생활모습과 풍습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멕시코 아스텍 언어 속에서 우리말의 원형을 찾는 연구도 진행 중에 있다.
세계 속에서의 신라의 위상을 증언한 대표적인 무형적 유물 기록으로는 중세 아랍문헌을 들 수 있다. 문헌은 신라의 자연환경(명칭, 지형, 위치, 자연, 자원 등)과 인문지리(생활상, 역사, 인물내왕, 교역 등)를 대차 없이 밝히면서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유하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마는‘이상향’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황금의 나라’로서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지도(1154)에 신라(5개 섬)를 명기하고 있다.
신라의 외연적 세계성은 많은 신라 고승들의 도축과 도당기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왕손인 원측(7C)은 중국 삼장법사 현장의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불로 추앙 받고 유식론의 일가견을 이루어 중국 법상종의 한 비조가 되었으며, 역시 신라 왕손인 지장(8C)은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인 구화산 성지의 창시자로서 안휘성에 벼농사를 전파함으로써 공히 신라의 얼을 빛냈다. 특히 한국의 첫 세계인인 혜초(8C)의 4년간에 걸친 서역기행과 그 현장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속에 신라를 각인시키는 데서 특출한 기여를 했다. 혜초는 문명교류사에서 개척자적,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여행기는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이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