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에도 동서(東西)로 갈라진 편향의 골은 여전하다. 우리끼리, 끼리끼리, 뭉쳐 다함께, 지향하는 것만 좇는다. 여기서 '우리'란 일종의 선동적 패거리문화이기도 하다. 동류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한다.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지역주의 성향은 근대사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동서는 아직도 많은 왜곡과 처절한 차별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지도 위의 우리나라는 안타깝게 작은 영토다. 그래서 안도현시인은 허리 굽은 조선소나무에서 우리나라 국토를 보았다. 소나무는 적은 강수량의 박토에서 아주 마디게 자란다. 뒤틀렸으나 속속들이 옹골찬 조선소나무. 그 한 그루의 나무도 온전히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동여맨 채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다. 그리고 동서의 골을 따라 흐르는 민심의 향방. 지역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완전한 '우리'란 아직 요원하다. 원시시대부터 불완전한 인간의 근원적 성향은 무리를 이루었다. 자신이 중심이 되기보다 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흡수되어 왔다. 특히 유교문화권의 우리는 다수의 견해에 자신의 소수 의견을 내는데 지나치게 겸손하다. 개개인의 특성은 감추고 남의 눈치에 익숙하다. 이 점은 서양문화와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내가 주체인 서양인들의 내면에는 스스로 사유하는 힘이 있다. 다수의 억압에 따르면 성숙한 자아의 분리된 정신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주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오래 전 주한미국대사였던 릴리는 "한국인은 생쥐 같아서 누가 앞서면 줄줄이 따른다"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정신분석학에서는 '감정표현불능'이라 부른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인 단순한 상황에서조차 답을 찾기보다 주위의 반응을 살핀다. 자기 주관에 대해 불투명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우애조차 믿을 것이 못된다. 언제 무슨 일로 무리의 견해를 좇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해졌다. 전 세계인의 인구는 70억이다. 단순히 피부색뿐 아니라 삶의 목적도 행태도 다 다르다. 나와 남이 다름을 인정하는 학습은 죽는 날까지 복습해야한다. 시험의 답안지처럼, 정해진 것 외에, 틀리는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다. 민주주의 절차가 다수결이긴 하지만 이건 가결을 위한 투표에 관해서이다. 평소 소수의 견해를 무시하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상명하달의 수직관계가 워낙 보편화된 현실이다. 이 견고한 관계설정은 미래세대에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 속에 숨은 '나'를 찾는 연습은 개인의 자질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구성원의 품격을 높인다. 오랫동안 주입식 교육을 받은 것이 보편화되었다. 스스로 나서기보다 후환이 없을 뒷줄에 서서 눈치나 본다면 죽은 사회가 된다. 선거 때마다 몰표의 유사한 기현상이 거듭되는 것은 병든 사회의 일면이다. 이런 현상에 외국의 언론에서는 일찍이 놀라움을 표했다. 어떤 결정에 의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공장의 물건처럼 거의가 일정하게 생산된다고 말이다. 선거의 공정한 페어플레이가 무색할 뿐인 '우리'의 지지표는 어쩌면 몽매함의 표상 모른다.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각도가 다르다. 지문처럼, 나와 남이 다른 것에 낯설어하지 말아야한다. '우리'라는 공동체적인 사고로 누군가의 뒤에 줄서기를 즐겨 하는 건 조로치매 같은 현상이다.  이 화 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