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같은 대작의 소설도 썼지만, 말년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이 영적인 주제의 단편소설도 꽤 써서 남겼다. 그 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가장 많이 알려진 단편소설인데 우리나라에는 그것을 제목으로 다른 몇 편의 단편을 묶어서 단편집이 나오기도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가난한 구두장이 세묜이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실패하고 홧김에 술을 마신 채 귀가하다가 교회 옆에서 옷도 입지 않고 추위에 떨고 있던 한 청년을 만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이 돈을 만들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아내 마트료나는 돈은커녕 웬 노숙자를 데리고 온 세묜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둘 다 밖으로 쫓아내려 하다가 세묜의 `당신 마음 속엔 하느님도 없소?`라고 하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이름이 미하일인 그 청년을 거두기로 한다.  미하일은 세묜에게서 기술을 배워 솜씨 좋은 구두를 만들기에 손님이 점점 늘어 세묜의 가계에 큰 보탬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부자가 거만하게 구두를 주문하며 미하일에게 그것을 만들라고 한다. 미하일은 부자의 죽음을 예견하여 구두 대신에 죽은 자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든다. 곧이어 그 부자가 죽었으니 구두가 아니라 슬리퍼를 만들라는 연락이 온다.  6년의 시간이 흐른 후, 한 부인이 두 여자아이를 데리고 신발을 만들고자 찾아온다. 여인은 이웃에 살던 아이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갈 데 없는 두 아이를 자기가 거두어 보살피다가 자기의 아이가 죽은 후 두 여자아이를 입양하여 계속 키워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미하일은 자신은 대천사 미카엘인데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벌로 세상으로 가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어야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이제 그 답을 찾은 것 같다고 한다.  그 답은 바로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이었다. 동전 한 푼 없어도 미하일을 거두어 준 세묜이나, 이웃의 딱한 고아를 자신의 밑에 거두어 보호한 가난한 부인이나 모두 마음 속에 사랑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현실에 사는 우리는 다들 무엇인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며 살아간다. 앞의 두 개의 `무엇`이 구체적으로 무엇일지는 빈 칸에 내용을 채워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고, 또 어떤 이는 현실의 삶을 풍족하게 영위하려고 애쓸 것이며,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청춘과 열정을 다 바칠 수도 있다. 또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들이라면 한 시각, 한 시각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겠지. 혹 세상사 모두를 떨치고 자신이 믿는 신(神)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이도 있다.  몇 년 전 터키 여행 중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본 동굴 교회, 올라가기도 어려운 암벽 중턱에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정도의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암벽에 신의 모습을 새기고 물감으로 이콘을 그려 교회를 만들어 박해를 피해 평생 은수자(隱修者)의 삶으로 신을 섬기던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성찰한 적은 있을까? 나의 경우, 무엇이 내 삶을 꾸려가는 동력(動力)이 되는지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으나, 성인이 된 후에는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을 만치 일상생활에 매몰되어 살아왔다.  주변에서 흔히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람을 살게 하는 큰 힘이라고, 노년기일수록 더더욱 돈이 있어야 힘을 가지고 사회에서 대접받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건 지나치게 속물적인 생각이다, 사람은 정신적인 무엇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건 다 잃어도 자존심이나 명예만은 포기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요즘 매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서해안 공무원 피살 사건을 보며 유족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다시금 돌아봐달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마음이 바로 빼앗긴 명예 때문이겠다고 혼자 추측한다.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이 월북자가 되어 죽음을 당한 고인(故人)도 고인이려니와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죽음만으로도 견디기 버거운데 설상가상으로 월북자 가족이라는 주위의 오해와 기피(忌避)로 일상의 삶은 부서지고 죽은 이와 그 가족의 명예는 박탈되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가족들이 저렇게 백방으로 호소하는 것은 그들 가족의 빼앗긴 명예를 회복하여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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