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위를 과감히 드러냈다. 짧은 청바지도 입었다. 이로보아 유행이 젊은이들의 전유물만은 아닌 성싶다. 배꼽이 보일 듯 말듯 한 티도 입어서다. 마스크를 벗고 잠시 생수를 마신다.  자세히 보니 주름 살 투성인 얼굴에 빨간 립스틱까지 발랐다. 또한 번쩍 거리는 장신구가 치렁거린다. 어림잡아 연세가 팔순은 족히 넘었을 외양이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매우 당당하다. 뒤태도 꼿꼿하다. 며칠 전 집 앞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할머니 모습이다.  이 때 호수를 산책하던 젊은 여성 몇몇이 그 할머니를 흘낏 흘낏 바라본다. 그리곤 자기네들끼리, 귀엣말을 나누며 입을 삐죽거린다. 연세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 모습이 왠지 생소하지 않다. 외려 노인의 옷차림일망정 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굳이 나이에 걸맞게 옷도 입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옷이란 보온 및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입기도 한다.  오죽하면`최고의 드레서`란 말도 있잖은가. 또한`옷이 날개`란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 기인한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옷에 대한 고정관념의 잣대가 때론 엄격하다. 젊은이들이 유행을 좇아 즐겨 입는 옷을 노인이 입으면 격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다수다.  심지어는 천속하다는 질타도 서슴치 않는다. 개인적 생각으론 이런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지나칠까.  학창 시절 한 때 미술에 심취한 적 있다. 그래 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이 때 흠모한 화가가 바로 폴 고갱이다. 그의 그림 중 유독`아름다운 앙젤`을 좋아한다.  이 그림은 다 아시다피 큰 얼굴에 짤막한 팔, 커다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입을 꼭 다문 채 앉아 있는 그림이다.  고갱이 프랑스의 퐁타방이라는 마을에 머물렀을 때 일이다. 그 마을 젊은 부부에게 신세를 진 고갱은 감사의 표시로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보냈다.  아쉽게도 초상화를 받아든 부인은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무슨 이런 추한 그림을 그려 보냈느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끝내 그녀는 그림을 고갱에게 되돌려 보내기까지 했다.  젊은 부인은 그 마을에서 미인으로 평판이 나있었다고 한다. 훗날 고갱은 그 부인의 이름을 따서`아름다운 앙젤`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 그림이 당시 비싼 가격에 팔렸다. 어느 사람이 초상화의 모델인 여인에게 그 그림이 비싸게 팔린 것을 알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닮지도 않은 그런 못난 그림을 가졌더라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쏘아 붙였단다.  하지만 화가인 고흐 동생 테오는 자신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 그 그림 속에 그려진 젊은 여인에겐 어미 소 같은 포근한 점을 느꼈으며, 얼굴의 표정 및 태도도 싱싱한 시골풍이 엿보여 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습니다." 라고 말이다.  이렇듯 고갱의 초상화에 얽힌 일화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림은 꼭 대상을 모방해야 한다는 확고한 관념이 그 여인에겐 있었나 보다.  반면 그 초상화에서 순박하고 소박한 시골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강미를 엿본 테오의 관점은 여인과 확연히 달랐다.  하긴 아름다움을 보는 눈인 미학(美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에게도 사유의 대상이 된 게 이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 필자에게 미술을 지도 했던 어느 미대 아르바이트생은 그 때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모름지기 화가의 눈은 사물을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렇게 바라본 시각으로 또 다른 사물의 형태를 창조하거나 세밀히 그려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제야 어느 연세 지긋한 할머니의 옷차림새를 바라보며 그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본다. 아울러 자신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지금껏 모든 사물을 과연 자유롭게 바라본 적 있던가. 평소 경직된 융통성 없는 사고에 갇혀 지낸 듯하다.  화가인 세잔의 말에 깊은 공감도 해본다."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가 보는 것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날 필자 앞에서 허릴 꼿꼿이 세우고 절음 걸이도 바르게 걷던 할머니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몸이 늙었다고 하여 뇌까지 노쇠하란 법은 없다는 생각에서인가. 노인의 허벅지까지 노출시킨 짧은 청바지와 배꼽 티 차림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만큼 생각이 젊다는 증표여서다.  이런 연유에서인가. 그날 필자 앞에서 젊은이들 복식(服飾) 차림을 하고 힘차게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모습이 왠지 부러웠다.  건강하고 샤프한 노년의 모습으로 비쳐져서다. 뿐만 아니라 머잖아 닮고 싶은 모델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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