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뭐라고 했던 간에 나는 `니체(Nietzsche)`의 철학에 머리를 싸 맬 생각이 없고, 모든 의문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자신의 철학(哲學)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언어를 가지면서 형이하학(形而下學)의 영역이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영역 모두를 언어로 정의(定義)해 보려 들지만, 모든 개념을 언어로 정리하려는 것은 학문의 속성일 뿐, 내가 보기엔 분명히 언어로 표현하거나 정의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로 설명하려는 철학은 진리에 접근하기 보다는 말장난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은 DNA의 시쀊스에 따라 아주 어릴 때는 본능만이 작용하다가 장성(長成)하면서 감성과 함께 사리분별이 생기고, 그런 상태를 들어 철이 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사람이 철이 든다는 말은 드디어 스스로 사물의 철리(哲理)를 깨우쳐 간다는 정신적 성숙 상태를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일 수가 있겠는데, 이는 어떤 종류의 전문 지식 습득 량이나 연륜과도 대체로 무관하기에, 철이 든 사람과 철이 들지 못한 사람을 외형으로 살펴 구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일 예로 암기력이 뛰어난 한 학승(學僧)이 있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모조리 암송한다거나, 생사를 걸고 무문관(無門館)에 든 수도승이 십 년을 장좌불와(長坐不臥) 면벽참선(面壁參禪)하였다 한들 깨달음과는 하등 무관할 수 있는 일인데, 다만 무심하게 호젓이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숲에서 날아오르는 장끼 소리에 놀라,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다는 얘기다.  기왕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점오점수(漸悟漸修) 논쟁에 대한 내 의견도 말해보고 싶어진다. 소위 속세(俗世)를 떠났다는 스님네들조차 왜 그런 부질없는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는지 모르지만, 무식한 내 견해로는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라 혹은 어떤 업연(業緣)에 따라 돈오(頓悟)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점오(漸悟)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그 말이다.  도(道)는 언어가 아니라 한 것처럼, 철학은 `니체`의 말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플라톤`의 저서 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학문의 영역에 포함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철학이나 신학이야 학문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 오래되긴 했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귀신심령학, 영혼도둑학, 위조전문학, 사기위장학 등도 대학에서 학위를 수여하는 날이 오지 않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신(神)은 신앙의 대상일지라도 연구의 대상은 아닐 것 같고, 철학 역시 연구할 학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자연히 알아가는 자아(自我)의 성장 과정일 뿐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인즉 무식하다 탓하지들 마시기 바란다.  육체의 조숙(早熟)이 조로(早老)를 불러오듯, 철이 너무 급하게 든 아이들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철이 든다`할 때의 `철`자와 철학(哲學)할 때 `철`자는 같은 의미로 보이기 때문에 철학은 사람의 이성(理性) 속에서 자연히 발현되는 진화 기전(mechanis)으로, 저 사람에겐 철학이 없어! 라는 말이야말로 아마 한 사람 인격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물론 나는 내 아내에겐 늘 철없는 남편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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