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전 신라서 살다가 다시 신라인으로 살기 위해 경주 왔습니다” 고대 신라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경주에서 환생한 주보돈(68) 교수.   주보돈 교수는 신라 및 가야사 연구로 유명한 한국 역사학계 석학이자 거두다. 가장 중점 연구사는 신라 중고기(中古期)이지만 신라사 전반에 걸쳐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고의 권위자로 손꼽힌다.    또 가야사, 백제사 등 고고학 연구와 대구 및 영남 지역사에도 많은 연구 성과를 도출해냈다. 특히 금석문, 목간, 죽간 등과 같은 문자자료에 주목해 신라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46년간의 대구 생활을 접고 2017년 3월 29일, 경주에 ‘살려고 왔다’는 주보돈 교수는 5년 7개월째 경주시민으로 살고 있다. 평소에도 즐겨 찾는다는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만난 주보돈 교수는 말과 글로 신라 당대를 복기해내는 듯했다.   경주에서 종과 횡으로 신라사의 대중화에 앞장서며 향후 출간 계획, 젊은 후학들과의 열린 교류를 지향하고 있는 그는 ‘신라’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이어주는 큰 어른이었다.   주 교수는 시종 ‘경주는 신라 연구의 보석 같은 현장’이며 ‘이런 공간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문헌과 함께 그러한 현장인 경주에서 젊은 연구자들의 학문간 융합을 바랐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측면에서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는 그는 ‘열린’ 학자였다.   주 교수는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 석사, 계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인문대학 학장, 교수회의장, 박물관장 등을 역임하고 2018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다.   주 교수는 원래 고대사를 공부하려고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해방 공간 이후 현대사 전문연구자가 되고 싶었으나 커리큘럼 연구 부재 등으로 한계가 많았다고 한다.   그 차제에 임나본부설을 접하며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 문제 해결의 전제로서 가야사에 집중하게 됐다고 한다.   “연구 당시 ‘일본서기’를 다루려면 사료를 다루는 역량이 충분해야 했으나 1970년대 가야사 연구의 한계는 뚜렷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 배나 많은 사료를 가진 한국 고대사 중심인 신라사부터 공부해야겠다고 판단했고 신라사로 전향해 주 전공은 신라사가 됐다”   신라사를 연구하면서 촌락사를 지배의 역사가 아닌 촌락에서 저항해 나가는 모습을 찾는 것이 출발점이었으나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가 돼 있어 주 교수가 찾는 사료는 없었고 그 방법론으로 금석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삼국사기나 유사는 여러 차례 걸러진 자료들인 것에 비해, 금석문에는 가공되지 않은 내용들이 나타나고 이 원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 목간 문자 자료를 주목해 연구하기에 내가 주장하는 이론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며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했다.   금석문 분야 연구에서는 첫 출발이었고 1998년 출간한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이 그 첫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신라의 촌락 지배 형태에 대한 변천과정을 마립간기부터 중고기까지 다뤘고 남산신성비부터 비교적 근래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비까지 중고기 초부터 중고기 후반까지의 금석문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존재해 이들 금석문을 치밀하게 분석해 신라 당대의 촌락지배형태를 구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이후 2002년 신라의 각종 금석문을 소개하고 분석한 ‘금석문과 신라사’에서는 영일냉수리신라비, 울진봉평신라비, 단양신라적성비 등 각종 비문과 석문, 금석문, 그리고 목간들을 소개하고 분석했다.   주 교수는 2016년 경북도가 5년에 걸쳐 편찬한 ‘신라사 대계(大系)-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38권의 편찬 및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이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넘어 신라 역사를 집대성한 도서로 이 대작업 중 주교수가 무려 16꼭지를 썼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공력을 많이 들인 작업’이라고 회고하는 주 교수는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향후 발행할 ‘신라사 개설’을 쓰는 연구 과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주에 살면서 특히 황룡사와 백률사를 자주 찾는다는 주 교수는 이미 1990년대부터 황룡사의 스토리텔링과 ‘황룡사의 밤’을 복원하는데 주목했다.   “황룡사 9층목탑의 외양에 대한 고증이 확실치 않고 기술력의 한계를 안고 있어서 목탑 복원보다는 빛으로 불을 밝혀 재현해보자고 제안했다”며 최근 실현되고 있는 디지털 복원을 당대에 제안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볼거리이자 획기적인 이슈로 황룡사 창건 등 관련 스토리텔링을 통해 황룡사 남쪽 비어 있는 공간에 연극제 등을 연다면 황룡사는 물론, 경주시가 사는 일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덧붙여서, 신라 시대 남산에서는 불사를 위한 불을 밝혔을 테고, 장관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경주 남산에 부처님오신날만이라도 일시에 불을 밝히는 행사도 제안했다고 한다. 선각적 혜안을 지닌 열린 고고학자의 면모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과거 발굴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30~40년 전 우리가 무지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안목의 부재로 미진했던 발굴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발굴로는 황룡사와 동궁과월지, 월성해자 발굴 등이다. 10년 발굴해야 하는 과정을 1년간 속전속결로 처리해버려 대부분의 중요 정보를 놓치고 말았다”면서 다시는 발굴뿐만 아니라 복원도 결코 쉽사리 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주와의 첫 인연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라사를 전공하던 학도로서 경주 황오시장 내 37호 고분 발굴 때였다. 15박 16일을 발굴 단원으로 참여했던 인연이 있고 당시 천마총 발굴과 황남대총 발굴도 참관하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그런 그가 “국내외인들이 가장 찾고 싶어하는 도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서 갖춰야 할 경주의 콘텐츠를 정리해 만들어내는 것이 은퇴 후, 경주에 와서 살고 싶은 중요한 이유였다”고 하면서 경주로 온 것은 역사문화도시로서의 경주를 잘 모른채 방치돼 있는 부분이 안타까워서였다고 한다.    20년 동안 세계문명탐사지를 다녀본 결과, 경주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는 그는 “경주인들은 대부분 큰 것, 겉으로 드러난 것을 쫓는 반면, 신라역사문화도시의 장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유형 이외에도 무형적인 자산에 대한 활용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수십 년 동안 문헌만으로 학술 행사나 회의 참석차 경주를 다녀갔던 것에서, 기록을 바탕으로 실제로 들여다보고 체취를 느껴보면서 느긋하게 연구해보고 싶었던 연유에서라고 했다.   “2020년 ‘신라 왕경의 이해’라는 책을 썼는데 제2권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걸으면서 그동안 연구실에 앉아서 문헌 자료만 보던 것과는 다른 이해가 가능해졌다. 연구자들에게도 직접 걸어보고 신라 사람들의 체취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있다. 이는 매우 소중한 부분으로 왕경연구뿐만 아니라 신라역사문화와 관련되는 전체 내용에도 현장의 소중함을 글 속에 담아 집필할 예정이다. 복원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또 신라사의 대중화 작업, 즉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들을 써 나가는 작업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그는 경주박물관과의 협업이 절실하다고 했다.   주 교수는 “경주가 오면 올수록 흥미진진한 도시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면 신라 역사와 문화 속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유산에 관한 도서가 없다”면서 국립경주박물관이 주도해 ‘경주 신라역사와 문화 100선(가제)’식의 휴대하기 좋은 문고판 발행과 경주 신라역사문화와 관련한 명품 강좌를 책과 연계해 개설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제2의 주보돈’을 꿈꾸는 후학들에게는 “경주에는 박물관이나 연구소, 연구 발굴 기관 등에 연구자들이 많지만 신라사와 미술사, 고고학, 건축학이 별개의 학문이 아님에도 문헌, 미술사, 불교사 등으로 너무 세분돼 있어 넓게 바라보고 인식의 폭을 확장하는 학문간 융합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자칫 자기 변신을 하지 않고는 지리멸렬해진다’는 주 교수는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며 고삐를 죈다. “이제 경주를 중심으로 젊은 연구자들과 대화하고 좋은 글을 쓰고 새로운 변화를 일궈내야 한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또 고고학이든, 미술사, 역사학이든 문제제기를 하고 뒤집어서 거꾸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과거 잘못된 연구를 새로 연구할 사명이 후진들에게 있다고 했다.   주 교수의 안면은 신라를 연모하듯, 늘 홍조를 띤다. 신라 역사에 대한 열정과 애정만큼 책무감도 강한 그는 외부 문화예술인들의 유입과 활용도 높이자고 주문했다.   사진촬영과 제공: 오세윤 문화재전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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