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8세와 6세 짜리 두 손주 녀석들이 할배와 할매가 사는 집을 찾아왔다. 언제 오목을 배웠는지, 두 녀석이 안방에 바둑판을 펼쳐놓고 오목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둘째의 울음보가 터졌다.  사연인즉, 실력이 비슷한 터라 둘이서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중 둘째가 실수를 하여 외통수에 몰리자 형아에게 한 수 물리자고 때를 쓰는데, 큰 놈이 일수불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할배가 개입을 했는데, 원칙을 주장하는 큰 놈을 두고 동생에 대한 아량이 부족하다 나무랄 수만은 없어, 울고 있는 둘째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울보`라고 놀려주었더니 둘째는 창피함을 느꼈는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 후 손주들의 손목을 잡고 공원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둘째가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을 좀 세게 부딪힌 것 같았지만 고통을 잘 참기에, 할배가 "오, 우리 완이가 참 용감하구나!" 하고 칭찬을 해 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녀석이 오히려 할배의 칭찬에 반발을 하는 게 아닌가? "할배! 아까는 울보라 놀려놓고 지금은 왜 용감하다고 해요!"  그러니까 둘째 놈은, 울보와 용감하다라는 어휘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할배가 한 말의 전후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데, 할배가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불과 6세 짜리 어린아이도 수치심을 가지며 또 이처럼 논리의 모순을 분명히 아는데, 지금 우리 어른들은 과연 어떠한가? 늘 원칙을 말하면서 원칙은 지키지 않고,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서도 수치를 모른다. 그리고 어린아이조차 동의할 수 없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생 때 쓰기를 일상화하면서 정의를 입에 담는다.  사람의 눈은 삼원색을 구분하며, 사람의 귀는 16헬즈에서 2만 헬즈 사이의 음파를 구분한다. 붉은 색을 붉은 색이라 하고, 녹색을 녹색이라 하는데 무슨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것이며, 성대(聲帶)의 발성(發聲)이 듣는 이의 고막(鼓膜)을 진동하는데 따로 전문가의 음파 분석이 필요할까?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만류인력의 법칙을 주창(主唱)했다고 하지만, 중력(重力)은 뉴턴 이전이나 이후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地球) 행성 위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어디에나 공히 적용되는 자연 법칙이다.  언어를 가진 인간들이 벌이는 논쟁이란 대부분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거짓이나 오류를 합리화하기 위한 생 때 쓰기의 소란스러움일 뿐이기에, 인간들이 그렇게도 많은 어휘와 그렇게도 복잡한 성문법(成文法)을 만든 것은, 복잡한 형상의 크고 아름다운 뿔을 진화시킨 사슴이 그 뿔 때문에 숲을 헤쳐 나오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주 만물(萬物)이 단 한 개의 양전하(陽電荷)와 음전하(陰電荷)로 이루어진 수소(水素) 원자에 기인하고, 불타 석가모니는 만법(萬法)이 공(空)함을 설하였듯이, 진실은 명료하고 단순하지만 거짓은 항상 모호하고 복잡하기 마련, 논리는 주장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함으로 귀납(歸納)된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어른들이야말로 아이들의 단순함을 보고 크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으며 느낀 대로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의 어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느낀 바조차 숨기려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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