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엔 매우 여성스럽다는 칭송을 받았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복스럽고 살색이 달빛 아래 이화(梨花)처럼 희디희다는 주위의 부러움도 샀다.  하지만 요즘은 성정(性情)이 변했다. 지난날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들어온 `조신하다`라는 평판이 무색해진 것이다. 외모 역시 흐르는 세월에 그 푸름을 거지반은 상실했다.  하긴 성향도 외양도 인생사에서 몇 번 변화를 겪는 게 우리네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면 궁색한 변명일까. 그동안 삶을 살며 온갖 세상 풍파를 겪느라 속진(俗塵)에 오염된 탓일 것이다.  잡초 근성도 지니게 됐잖은가. 자연 이러다보니 필자의 본성을 미처 모르는 사람은, 강하다는 평가도 한다. 한편으론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라는 충언도 해준다. 이는 평소 성격이 너무 올곧고 소신이 뚜렷해서란다.  하지만 현대엔 여성상도 뒤바뀌었잖은가.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리만치 마냥 연약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여권 신장이 향상된 현대엔 더욱 그렇다. 내가 무슨 여권 운동가는 아니다. 여성도 매사 도전적이고 내공이 강해야만 이 힘든 세상사를 헤쳐 나갈 수 있다면 자기변호일까.  예전엔 여자는 결혼하여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현덕(賢德) 한 여성의 본분(本分)으로 여겼다. 전과 달리 요즘 젊은 여성들은 삶의 자세 및 사고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결혼보다 자신의 자아실현과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는 다양한 능력을 갖추기를 추구한다. 사회각계각층에 불어오는 여풍(女風)만 살펴봐도 그 위세가 남자 못지않다.  그럼에도 유행가 가사를 살펴보면 여전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짐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도 사회적 문화 현상에 대한 여권주의 (Feminism)적 차원의 접근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 가사를 살펴보면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할 가사가 제법 있다. 가수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경우만 살펴봐도 그렇다.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라는 가사인 경우 피동성이 여성의 아름다운 미덕임을 쉽게 인정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디 이뿐이랴. 여자의 일방적인 인고(忍苦)와 일편단심의 강한 강조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이라는 노래에도 극명히 다루어지고 있다.  한 때는 18번(?)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기도 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지난날 친정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는 듯해서다. 그러나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라고 끝나는 부분을 부를 땐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미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역경도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일변도(一邊倒)여서이다. 아무리 여자이지만 자기 몫의 인생 권리인 소신도 주관도 내세울 수 없단 말인가.  하긴 아직도 여자가 자기주장이 강하면,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곤 한다. 이러한 반(反) 여권주의적인 남자들의 사고가 존재하는 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및 윤항기의 `그런 거지 뭐`라는 유행가 가사는 전혀 수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윤항기의 노래 `그런거지 뭐` 가사엔 `무슨 불평 그렇게도 많은지/ 그러기에 여자인가 봐`라는 제1 절 끝 부분 가사는 여자를 마치 매사 불만만 잔뜩 늘어놓는 존재로 그려냈다.  이는 노래 작사자들이 남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익숙하다는 방증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필자 역시 여성이어서 인가. 요즘엔 흘러간 옛 노래로선 최희준의 노래 `엄처시하`를 즐겨 부른다.  이젠 세상이 많이 변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흥하는 세태 아닌가. 그만큼 여자도 남자를 월등히 뛰어넘는 능력과 지혜를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최희준의 이 `엄처시하`를 부를 때마다 공처가, 애처가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마저 가져본다. 아울러 이왕이면 남녀 모두 서로 존중해주고 아껴줄 수 있는 노래라도 나온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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