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이 이리저리 산책삼아 다니다 눈에 띄는 옛 기차역으로 발길이 갔습니다. 이제는 철도 선로가 바뀌어 역은 딴 곳으로 옮겨가고 덜렁 건물만 남은 폐 역사(閉 驛舍)입니다.  창문이든 출입구든 문마다 양철판을 대고 꽝꽝 못질을 해서 출입을 막아 둔 건물 뒤를 돌아서 플랫폼으로 나갔습니다.  한때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앉았을 나무벤치가 비를 맞고 바람에 말라서 갈라진 채 갈 길을 잃은 철로 곁을 지킵니다.  철길 건너편, 봄이면 보랏빛 등불 같은 꽃들을 무수히 밝히고 있던 오동나무도 이젠 잎을 다 떨구고 겨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저절로 자랐다가 말라버린 무성한 잡풀들과 폐쇄된 문들은 이미 겨울이 그곳을 차지한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겨울은 자연의 모든 것이 휴면기(休眠期)에 드는 철입니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죽음의 이미지로 흔히 쓰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겨울은 다시 올 봄을 전제하므로 성장을 위한 쉼과 준비의 시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한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극작가인 월레 소잉카의 희곡이 이 영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이지리아 남부 오요 왕국의 요루바 부족의 왕이 죽었습니다. 이에 따라 부족민들은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의식(왕이 묻히기 전에 왕을 저승길로 인도할 왕의 기사 엘레신 오바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식)을 치를 준비를 합니다. 왕의 기사는 온 부족민의 찬탄과 존경을 받으며 그날 하루를 축제처럼 즐기며 명예로운 죽음을 준비합니다.  부족민들도 엘레신을 뒤따르며 북을 두드리고 흥겹게 춤을 추며 그를 찬양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행해질 엘레신의 성스러운 죽음을 기다립니다 . 슬프고 암울할 죽음의 절차가 이 부족에게는 왕의 기사를 명예롭게 보내기 위한 축제가 됩니다.  우리에게도 장례 절차가 하나의 잔치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진도의 다시래기와 같이 죽음을 달래는 조상굿에는 가무(歌舞)만이 아니라 상주 역할을 하는 이와 산받이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유희적 장면을 연출하며 죽음과 축제의 열린 만남을 만들어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충과 효를 강조하던 유교의 영향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관혼상제의 기준이 되어 강박적으로 장례는 엄숙하고 비장함이 강요되니 이전부터 내려오던 민족고유의 장례풍습은 무시되어 차츰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 고유의 장례는 놀이와 한 테두리로 묶여져 있었습니다.  민속자료에 기록이 남아있는 대로 진도의 다시래기 뿐 아니라 경상도의 빈 상여놀이, 충청도의 호상놀이, 경기도의 상여놀이처럼 원래 우리의 장례 문화는 하나의 놀이판이었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인 에릭 울프는 농민 문화는 축제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야보다도 농업은 결속된 다수의 일손이 요구되었고 농민들은 이런저런 축제를 통해서 자기네끼리의 유대감을 높이려 하였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장례 문화도 단순하게 애도 중심인 가족만의 통과 의례가 아니라 사회적인 단합과 결속을 도모하는 축제 문화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농업 사회에서 겨울이란 단순히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힘을 기르기 위한 휴식을 취하고, 새 약동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겨울이 되어 하데스에게로 내려간 페르세포네는 봄이 되면 다시 어머니인 곡물과 수확의 신 데메테르에게로 돌아갑니다. 잠시 이별해야 하더라도 딸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데메테르에게 겨울은 희망을 위한 내적 성숙의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봄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기에 겨울은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려도 견딜만하고 추위가 아무리 혹심해도 그것이 물러가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 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삶과 죽음은 자연의 순환에 따르는 당연한 현실이며,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생명으로 귀환한다고 믿었기에 장례와 축제의 열린 만남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메마른 가지에 달린 말라버린 찔레 열매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라는 붉은 씨앗을 품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