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년 전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관련한 숨가빴던 경주 근현대사 이야기 그 네 번째로는, 경주 교동에서 최부잣집 문파 최준을 중심으로 근대에 설립됐던 여러 학교들에 관한 이야기다.   교동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교육기관은 경주향교가 있지만 1950년대에는 서당에서부터 초등학교, 대학까지 존재했다.   2018년 발견된 최부자댁 수 만점 고문서 중 경주국채보상운동 자료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교동에서의 근대학교 발생설을 기록으로 증명해 보인 결정적 단서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주국채보상운동 성책에서는 ‘문상학교(汶上學校)’ 교직원과 학생들의 이름, 그들의 성금 액수가 확인됐고 월성학교 설립에 관한 간찰도 여러 점 발견됐다. 원래 교촌에는 지금의 숙연당 자리에 마을 서당이 있었는데 문상학교는 서당과 근대학교의 중간 형태로 추정된다. 또 발견된 문서 중에는 ‘월성학교’ 설립에 관한 간찰도 여러 점 있다.   이는 지역 유림들이 세운 육영재(育英齋)를 일제가 초등교육기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접수했다가 경주심상소학교(지금의 계림초등학교)를 개교시키면서 1907년 반환했다.    당시 유림은 반환받은 육영재를 근대 교육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최준을 초대했고 1907년 교촌에서 월성학교로 개교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 교육을 중요시 한 최준은 1911년 경주 읍내 북정에 ‘사립월성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니 최준이 사립월성여학교를 설립하기 전부터 교촌에 월성학교가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최부잣집 비보림에서 개교한 ‘황남초등학교’와 향교에서 개교한 ‘구 계림중학교(지금의 선덕여자중학교)’ 까지 포함하면 이 작은 마을에 있었던 학교 숫자는 매우 많았다. 따라서 향교가 있는 마을 ‘교촌’이라고 부르기에 그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55년 개교한 당시 2년제 대학인 계림학숙(鷄林學塾)은 대구여자초급대학으로, 다시 지금의 영남이공대학교가 됐으나 계림학숙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 즉 학숙의 위치, 조직, 교수진, 수업내용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계림학숙의 보다 구체적 설립 이야기는 ‘동북아 문화연구 제16집’ 중 최재목과 정다운의 ‘계림학숙과 범부 김정설(설립기를 중심으로)’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최씨고택과 경주 향교 등을 공간으로 설립, 운영됐던 계림학숙의 내용들은 영남학원의 보관 자료와 계림학숙 설립 시에 입학하고 졸업 후 계림학숙이 폐교될 때까지 교무처장으로 재직했던 최인환 옹(1927- )의 증언 등을 통했다고 한다.   ‘계림학숙과 범부 김정설’에 의하면 ‘계림학숙은 최준(1884-1970)이 1955년 경주 교동에 세운 초급대학으로 초대학장은 범부 김정설(1897-1966, 이하 김범부)이 맡았으며 문파 최준이 이사장을 맡았다고 한다.    김범부에 의해 지어진 ‘계림학숙’은 지명을 나타내는 ‘계림’과 일본의 ‘사숙, 의숙’이란 뜻을 내포한 ‘학숙’을 합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경주에 수많은 피난민이 내려왔고 이 중에는 대학교수와 대학생들도 많았다. 김범부 · 김동리 형제와 조지훈, 진홍섭 등이 이 대학에서 강의했을 정도로 교수진은 대단했다.    교육과정은 기초와 전공으로 분리돼, 김범부라는 인물의 영향으로 교육상에 철학 교육이 기초가 됐다. 계림학숙 평면도와 최인환 옹의 구술 등을 토대로, 계림학숙이 학생과나 교무과, 그리고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는 명실상부한 대학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최인환 옹에 따르면, 계림학숙의 기초교양강의는 주로 최씨고택 옆에 위치한 ‘향교’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고 기초강의를 제외한 강의는 주로 최씨고택에서 도보로 채 2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의 ‘숙연당’과 김범부가 서울에서 내려와 기거했던 ‘요석궁’에서 이뤄졌다고 전한다. 당시 최부잣집 일대 교동은 대학 캠퍼스로 역할했던 것이다.   교직원은 학장 김범부 1인 외에 교수 4인, 부교수 2인, 강사 9인, 그리고 사무원 1인이었다. 학장이자 교수인 김범부는 역사철학과 문화사 등을, 한태수는 정치사 등을, 김동리는 예술론과 미학개론 등을, 변관식은 미술실기를, 조지훈은 국문학과 국사 등을, 김준식은 도학과 미술특론 등을, 김만술은 조각을, 김종후는 인식론과 심리학을, 오종식은 경제정책과 신문학을, 안용대는 비교헌법과 헌정사 등을 가르쳤다.    이들 16인의 교수들(강사 포함) 중에서 김범부를 포함해 5인이 일본 유학생이었고, 4인이 서울지역 대학 출신이었다.   계림학숙의 규모는 ‘계림대학교지평면도’에 나타나 있다. 총 6686평에 강당과 교실이 있고, 뒤로는 계림숲이 있었다. 건물 10동과 운동장 두 개 등도 포함돼 있다.    경주 향교 명륜당을 강의실로, 최부잣집 본채는 학장실, 학교 본관 역할 등을 했으며 교동의 집들이 주로 계림학숙 교사로 사용되거나 부속 건물로 이용됐다.   194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예술대학이라 할 수 있는 경주예술학교가 경영난에 빠져 계림학숙에 통합되자 김준식이 미술과를 맡아 ‘경주예술학교의 계림학숙 시대’를 이어갔다’고 썼다.   한편, 최해진의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에서는 최부잣집의 순수한 교육 열정과 경주 계림학숙을 창설한 배경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해방이 되자 일본 식산은행에 담보로 잡힌 최부잣집 재산이 환수되고 재빨리 바로 그해 대학건립에 착수해 1947년 대구민립대학을 설립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구대학을 설립하고 남은 전 재산(과수원 9536평, 대지 1만1442평, 전답 1만 2772평, 임야 8973평, 건물 16동 351평, 산림 276정보)을 출연해 1954년 경주에서 문파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이를 모체로 경주 계림학숙을 창설한다.    이 계림학숙은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가 제안해 설립된 것으로 “대한민국교육법에 의해 심오한 학술이론을 연마하며 철저한 응용방법을 교수하여 국가사회에 유능한 인재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경주의 향교와 문중 전래의 서당이었던 ‘숙연당’을 비롯, 본댁의 사랑 상하체 2동 12간을 일부 개조해 교사로 사용했다. 그러나 소재지가 시골이고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때에 전쟁이 끝나자 교수들마저 모두 서울로 가버려 대학 운영이 어렵게 된다.   부득이 1957년 휴교하고 최준의 전 재산을 모두 바친 문파교육재단을 대구대학재단으로 기부해 통합됐다.   운영하던 계림학숙도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과 통합해, 대구대학 병설 여자초급대학으로 모습을 바꿔 개교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재산이 대구대학재단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썼다.   한편, 교동에 남아있는 당시 캠퍼스의 흔적은 현재 4군데로, 당시 대학 본관이었던 최부자 사랑채, 교양과정 강의동인 경주 향교 명륜당과 숙연당, 전공 과정 강의실이자 김범부 개인 강의실이었던 지금의 최부자홍보관 등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한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안내판 설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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