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은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5번째 아들로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치른 후 왕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왕좌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왕자의 난으로 이복형제와 친형제의 피를 뿌리고 왕위에 오르다보니 마지막엔 아버지 이성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함흥과 한양에서 각자 떨어져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나 17년 10개월간의 재임기간동안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겨 창업왕조를 반석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아들 세종의 원활한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헌릉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으로 본인이 상왕시절 이양달 등 지관의 도움을 받아 직접 점지한 곳이다. 세종2년 원경왕후가 먼저 승하하자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대모산에 안장하고 2년 후 자신도 이곳에 묻힌다. `세종신록`에 의하면 "대모산에 땅을 파보니 흙의 빛이 번지르르하고 윤택하여 생기 가득한 오색토가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과 신하들이 오색토의 진위여부를 분석한 이유는 풍수입지조건에서 명당의 흙 색깔은 반드시 오색토여야 하기 때문이다. 풍수에서는 아무리 좋은 혈장이 되어도 오색토가 나오지 않거나 올바른 천광을 하지 아니하면 그곳이 비록 명당이라 할지라도 지기가 미약해 제대로 발복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헌릉의 풍수적 입지조건은 전체적인 국세가 크고 대모산(292m)에서 출발한 용맥은 혈장까지 지현과 기복을 하였기 때문에 생기 충만한 용맥이다. 혈장에는 혈을 튼튼하게 보호해주는 귀성(鬼星)과 요성(曜星)이 붙어있어 혈에 많은 생기를 응축시켜주고 좌향(坐向)은 양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건좌손향(乾坐巽向:동남향)으로 놓여 져있다. 주위의 사신사도 혈장을 잘 감싸주고 특히 좌청룡이 발달하여 멀리서나마 혈장 앞 안대(案山)까지 만들었다. 물은 우선룡에 좌선수로써 합법하지만 혈장과 앞쪽 안산과의 거리가 좀 멀어 약간 허(虛)하게 보이는 결점도 있다. 이러한 허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혈장 앞쪽에 정자각과 신도비를 세우고 혈장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비보(裨補)를 하여 능지(陵地)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仁陵)과 함께 있어 두 능을 묶어 헌인릉이라 부른다. 태종의 헌릉은 주위에 여러 가지의 혈증(穴證)을 갖추고 있었다고 세종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풍수지관 이양달이 먼저 소점 하였고 좌의정 하륜이 길지로 인정한 곳이다. 그러나 이용(李庸) 등은 청룡쪽에 밖으로 향한 산의 줄기가 있어 혈장의 생기가 누설될 수가 있다며 반기를 들었으나 이 양달이 수구에 큰 산이 눌러 막으면 작은 산(山)가지는 무시해도 된다는 풍수논리를 내세워 일단락 지웠으며 세종은 이양달의 논리를 근거로 왕릉을 조성하게 하였다. 이곳 묘소의 장명등 앞에는 넓은 돌(石)판이 놓여 져 있는데 이것은 세종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자 깔아놓은 것으로 세종의 효심이 엿보이는 광경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태종의 헌릉은 조선왕릉 중에서도 4대 길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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