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롯한 노인 세대에게 위의 제목은 폭력적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미국 소설가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감독 코엔 형제가 만든 영화의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제80회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과 다른 분야의 상을 두루 수상한 데다 평론가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습니다.   한적한 교외에 사는 한 사나이가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손에 넣게 되고 이로 인해 사나이는 갱단과 갱단이 고용한 살인마에게 쫓기며 총격이 일어나고 거기에 보안관까지 얽혀서 서로 쫓고 쫓기는 내용의 하드보일드한 스릴러 영화입니다. 매우 낯익은 영화 제목과 아카데미상 수상작이라는 점에 끌려 선택해서 본 영화입니다만, 솔직하게 선과 악의 구분도 없이 필요에 따라 총을 난사하고 거기에 애매한 사람이 죽고 하는 내용 전개가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져서 보는 둥 마는 둥 해서인지 스페인 출신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무표정한 사이코패스 살인자 역할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 외에는 별로 남은 게 없습니다.   사실 영화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B.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 첫 행인 ‘저것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를 차용한 것입니다. 예이츠는 나와 같은 시절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그는 아일랜드에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며 현대 영문학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 한 명에 드는 시인입니다. 예이츠가 이 시를 쓴 나이가 60세를 넘겼으니 당시의 그 또한 자신이 말한 ‘노인’에 포함되겠지요.   비잔티움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로마 시대의 이름이지만, 예이츠에게 비잔티움은 ‘이상향’을 대신하는 낱말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현대사회는 욕망과 욕정이 들끓는 육체가 정신을 이기는 사회라고 봅니다. 시에는 생명과 죽음, 육체와 정신, 관능과 지성처럼 대조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데 관능적 육체와 향락과 유한한 젊음에 탐닉하는 이 세계는 더 이상 노인들을 위한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것들은 삶과 죽음의 순환에 갇혀 있는 존재들인데도 젊음은 현재의 관능과 향락에 빠져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지성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영원의 지혜와 불멸의 지성, 영원한 예술 세계인 비잔티움으로 가서 정신의 안위를 얻고 영혼의 해방구를 찾고자 합니다.   노인은 인생의 최종 단계에 든 사람입니다. 사회학적으로는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치지만 식생활과 의료의 질적 수준이 매우 높아진 오늘날 65세는 노인이라고 불리기를 싫어할 정도로 신체적으로 생생한 노인들이 많습니다. 2022년 우리나라 노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7.5%로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했습니다. 노인 인구의 증가는 그들에 대한 복지 예산을 늘게 하여 세금으로 이 예산을 떠맡게 될 젊은 세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게다가 유교적 장유유서 개념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나이 많은 사람이 윗사람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 드러내는 노인들이 왕왕 있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요즘의 젊은 세대는 노년층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넘어 노친네, 노땅, 심지어 틀딱이라고 노인을 비하하는 단어도 만들어냅니다. 그만큼 사회 내의 세대 간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고죽을 토벌하러 나섰을 때였습니다. 봄에 출정하여 겨울에 귀환하게 되니 그동안 주변 풍경이 변하여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 환공을 수행하고 있던 관중(管仲)이 늙은 말의 고삐를 풀어 그 뒤를 따를 것을 권했습니다. 늙은 말이 기억하는 대로 길을 따르니 마침내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인의 지혜를 말하는 예화는 참 많습니다. 늙은 말의 오래 된 경험이 길을 찾게 하듯, 긴 시간을 살며 경험하고 공부하고 깨우친 지혜와 지식에는 그것을 지닌 이의 살아 온 시간이 밑바탕을 이루고, 그런 것들을 기록해 남긴 책을 통해 인류는 차곡차곡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앞에 든 예이츠의 시에서 ‘삶이란 잉태하고 나고 죽고의 순환’이라 하고, 노인의 정신을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젊음을 누리지만 결국은 누구나 노인이 되고 맙니다. 이 순환을 따라가는 수많은 개체들이 각각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공존하고 조화하는 것이 인간세(人間世)입니다. ‘따로 또 같이’의 균형이 잘 어우러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제 편의 주장에 반하는 노인 세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래가 짧은 세대, 미래에는 살아 있지도 않을 이들’이라 비하한 정치인들도 있군요. 작고하신 이영희 선생도 ‘새는 좌우의 두 날개로 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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