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 진실과 거짓 사이에 교묘히 내장 돼 역사 이래 숱하게 사용된 물건임을 저는 솔직히 자인합니다. 돌이켜보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목이 하도 많아 면죄 받을 길이 막막함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다하여 몹쓸 짓만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 두께가 어마어마하고 단단하기가 철석(鐵石)을 능가하여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제 본성입니다.    이 때문인지 전 적어도 제 잘못을 이런 방법으로 합리화, 정당화 시킬 수밖에 없음을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시장 원리에 적용 되는 수요와 공급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제 몸뚱이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이 있기에 부득이 항시 사용 가능한 물건이 됐습지요. 궁색한 변명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겉볼안을 중시하고 진실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세태이다 보니 제 몸이 불티나듯 팔렸습니다. 하여 인간들 심보 깊이에 따라 천(千)을 지닌 얼굴 만(萬)의 얼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바라옵건대 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프랑스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아나톨 프랑스(1844-1924) 언술쯤은 다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거짓이 없는 인류라면 절망 하게 되고 권태에 빠져 이 때문에 스스로 망가지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 말은 사람에게 진실 못지않게 허위 또한 필요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간교히 이용할 때 제 얼굴이 가장 빛날 때라면 설마 제게 돌팔매는 던지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너무 저를 향해 심한 비난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래 봐도 사회악(社會惡)의 축이 될 제 몸뚱이입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인류사에 꼭 필요한 저이기도 하잖습니까? 저도 따지고 보면 착한 일면은 남아있답니다. 물론 구차한 해명일지 몰라도 “선의의 거짓에도 제 몸뚱이가 기여한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왠지 이 말씀 드리고 보니 썩 명쾌한 기분은 아니군요. 왜냐하면 당신들이 치졸하고 교활하고 간교한 술책을 펼칠 때 마다 제가 꼭 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가장 적합한 자리는 이런 곳입니다. 당신들이 세상살이를 눈 저울질 하며 덫, 함정, 올가미를 상대방에게 씌우거나 그물을 칠 때 그 자리가 곧 제겐 명당자리라는 것은 이미 묵계된 일로 압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잠깐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렵니까? 매사 소신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탁류가 넘치는 세상에 이런 사람 흔치 않습니다. 헌데 그 사람의 이름 석 자를 거론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어 전 그 사람에게 선택 됐었습니다. 여태껏 많은 권모술수, 모함, 음해 등에 제가 사용됐지만 이번 일만큼은 저 역시 가슴 아팠습니다. 아니 저도 일말의 양심은 티끌만큼 남아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저를 선택한 이중인격자 인(人)이 꼿꼿하고 곧은 성품인 어느 사람을 자신의 얄팍한 낯을 가리는 가리개로 삼아서 참으로 비굴하게 뜻을 이루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결국은 애꿎은 그 사람만 당한 격이지요. 그래놓고 토사구팽 아시지요? 돌아서서 이번엔 마음 결 곧은 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제 몸을 빌렸습니다. 이게 당신들 본연이라 할 한 뼘의 낯입니다. 그리고 소위 양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마음자락입니다. 다만 저는 그런 당신들 심사에 이용당해 카멜레온처럼 실정에 맞춰 제 모습을 바꾸는 기술만 능란하게 체득했을 뿐입니다. 원형 그대로 보이면 손해 볼일들이 많다고 여기는 것은 순전히 당신들 책임입니다. 원형을 제 몸뚱이로 가려놓고 거기에 분칠하고 덧바르고 이젠 성형까지 해대며 본질을 훼손시키는 일이 다반사인 것 당신들도 익히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렇지만 저도 이 짓엔 이제 신물이 납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멸망치 않는 한 언제까지 이 구실을 해내야 할지 그 기한을 예측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 문제는 제 모습에 쉽사리 열광하고 때론 매혹 당하는 당신들 어리석음 입니다. 상대방 달콤한 감언이설에 속아 비밀을 선뜻 내어주고 정을 나누고 믿음을 가지기 예사 아닙니까? 헌데 제 본질은 그런 단순하고 맑은 혼(魂)을 지닌 사람들일수록 골탕 먹이는 일에 정열을 쏟고 있답니다. 각박하고 살벌한 요즘 세상, 순수와 순연을 아직도 가슴에 지니고 산단 말입니까? 외람된 충고를 하는 이유는 전 그런 선한 사람이 많을수록 자꾸만 제 나쁜 짓이 이젠 마음에 걸려서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세월을 인간들 낯 위에서 지내느라 저도 노쇠하여 늦게나마 철이 드나봅니다. 그러하오니 제 모습을 경계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모습을 이젠 발가벗겨 보여드렸으니 그 실체를 조금은 확인 하셨으리라 미뤄 짐작 합니다. 간절한 부탁이 있다면 밝은 사회 구현을 위해 정치인들은 제발 저 좀 폐기 처분해 주십시오. 세상 밖에 다시는 제 얼굴을 내밀 수 없도록 해주세요. 특히 정치하는 분들, 저를 준수한 외양에 빈번하게 뒤집어쓰진 말아 주세요. 용광로 속이라도 좋으니 제 몸을 그 뜨거운 불 속에 과감히 던져 주십시오. 그래야만 진실이 드디어 환한 세상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걷는 사람들이 비로소 숨통이 트일 것입니다. 가면假面의 이 마지막 당부를 그대들은 한시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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