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을 심은 밭에 팥 나는 것을 보았는가? 아니면 팥 심은 데 콩 나는 것을 보았는가? ‘나사렛 예수’가 빵 한 조각으로 삼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했다는 소리는 들어도, 콩으로 팥을 만들었다거나 모래로 밥을 짓는 기적을 행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유목(幼木)으로 서까래를 삼을 수는 있어도 유목을 대들보로 쓴다면 그 집이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처럼 목수는 재목을 보아 그 쓰임새를 찾는다. 마당에 개(犬)집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궁궐을 짓는 다면 과연 어떤 건축물이 나올까?중원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권세로 영생을 꿈꾸었지만, 영생은커녕 장수조차 하지 못했으며,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복속시키려 했던 ‘징기스칸’도 정복 원정길에서 비명횡사 하였고, 역시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알렉산더’ 또한 원정길에 요절하지 않았는가?그들은 모두 희대의 영웅이 될 자질을 타고 난 사람들로 보이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그 터무니없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을까 생각하면, 나는 결코 영웅을 좋아할 수가 없다.사실상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로서는 합법적인 선거 절차에 의해 독일이라는 국가의 대권을 장악하자, 그는 세계 정복의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매우 합리적 성격을 지닌 독일 국민들이 왜 ‘히틀러’ 같은 광인을 총통으로 선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이성을 지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와 힘이다’ 때문에 비단 히틀러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영웅들은 바로 그 공포와 힘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집단 광기에 빠져들게 만든 것은 아닌지?팥을 심고 콩 나기를 기다리게 하고, 눈앞에 있는 팥을 콩이라 우겨도 그것은 콩이 아니라 팥이라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언어의 혼란인가? 이성의 마비인가?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납치범에 동화되는 심리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한다는데, 이는 마치 성폭행 당한 여성이 그 범인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라는 의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이성을 능욕당한 사람들이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하는 행동에 우리는 연민을 가져야 하는지 아니면 분노를 느껴야 하는지를 모르겠지만, 필경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범행을 적극 방조한 사람들까지도 용서되기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게 내 이성(理性)의 소리이다.흔히들 위록지마(謂鹿之馬)라고 하지만, 사실 문법적으로 틀린 한문이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우기는 것은 지록위마(指鹿爲馬)가 바른 표기인 것 같은데, 팥을 콩이라 우기는 일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만일 콩과 팥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팥을 콩이라 우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식이라 해야 할 것인가? 다만 생각의 차이라 해야 할 것인가?메주를 쑤는 콩은 대개 황두(黃豆)이겠지만, 붉은 색 콩도 있을 수 있으니 두(豆)는 다 두(豆)인데 그것이 팥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시시비비(是是非非) 할라치면 시료(試料)를 국과수에 보내어 DNA 검사라도 해야 할는지 모르지만, DNA 검사 결과조차 조작되었을 수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누가 콩을 콩이라 하면 그 콩이 콩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법치(法治)는 아닐 것이다.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곧 법(法)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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