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한 재야운동가 백기완씨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1932년생으로 올해 나이 여든 여덟살인 백기완씨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시민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정치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1967년 故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 후 박정희 유신정권과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했으며, 1985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에 참여했다. '장산곶매 이야기',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등을 써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1987년의 제13대와 1992년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중도사퇴하거나 낙선하기도 했다. 백기완은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했다.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문제에 눈을 떠서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고, 이와함께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79년에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다가 1981년에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재야 운동권의 일부인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선후보직을 양보해 군정종식을 위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그러나 1987년 9월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 노태우가 3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선거에서 군사정권이 연장되자, 실망한 그는 제도권 정치권과 타협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수야당과 결별했다.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재야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다시 12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2번의 대선 모두 별도의 정당이 없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특별히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 약칭 백선본이 구성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이후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를 맡아 재야에서 계속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관여,진력해 오고있다. 백기완씨가 통일운동에 전념하게 된 것은 그의 가족사 때문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모와 작은 형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고, 큰형 등 나머지 가족은 북쪽에 남아 이산가족이 됐다. 북에 남은 큰형 백기성은 황해민보의 기자생활을 하며 '사회주의자'로 청춘을 보낸 반면 작은형 백기현은 24세이던 51년 한국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해 전투에서 숨졌다.이후 큰형 백기성은 57년 남파간첩의 임무를 띠고 월남했으나 곧바로 당국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0여 년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한 백기성은 이후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지난 30여 년간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 호랑이'를 통해 통일염원을 나타내 보겠다는 생각에서 호랑이의 생태에 대한 사진 자료와 관련 민족 신화를 수집했고, 이를 책으로 내려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지난 2002년에 월드컵 한국축구팀 감독이었던 히딩크와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히딩크감독은 2002년 4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대표선수들에게 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열정적인 강연 모습, 한복차림의 독특한 카리스마, 통일운동에 헌신한 이력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을 떠나기 전 히딩크감독은 출국에 앞서 백기완을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고 이를 듣고 공항으로 나온 백기완에게 작별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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