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두 구가 나란히/ 저항한 흔적도 없이/ 뼈로 응답한 월성 축조기/ 목간에는 병오년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미 숲이 된 사람들,/ 자작나무 두 그루가 누어 있었다// -황영선 시 ‘순장, 그 천년의 잠’ 중에서. 황영선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고요하지만 강렬한 울림이 먼저 다가온다. 격정의 언어도 과장된 수사도 아님에도 오랜 시간 삶을 견디며 축적된 숨결 같은 문장들이 시편마다 잔잔히 번져 나온다. 아픈데도 따뜻하고 슬픈데도 환한 감각, 그 이중의 정서가 최근 발간한 시집 ‘그리움을 탁본하다’ 전편을 감싼다. 경주에 사는 황영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리움을 탁본하다(목민사)’가 경북문화재단 2025년 예술작품지원사업에 선정돼 출간됐다. 경주문인협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시인은 앞선 시집들에서 보여준 자연의 온기와 생명 감각을 이번 시집에서 한층 깊어진 사유의 층위로 확장한다.황영선의 시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정제된 침묵 속의 진동에 가깝다. 그는 삶의 상처와 그리움을 단순히 토로하거나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존재의 중심’으로 끌어안아 다시 빛과 바람, 꽃과 생명으로 변환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상처가 지워진 흔적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해 도달한 화해의 온기가 남는다. 표제작 ‘무장사지에서 그리움을 탁본하다’를 비롯해 ‘동리 생가 가는 길’, ‘금오신화를 찾아서’, ‘열암곡 마애불’, ‘분황사’, ‘첨성대’ 등 이번 시집에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관통한 풍정(風情)들이 주요한 시적 좌표로 등장한다. 여기에 고향 영천의 기억, 이따금 맞닥뜨린 사소한 일상의 단상들이 더해져 모두 5부에 걸쳐 펼쳐진다. 잘 알려진 문화유산뿐 아니라 이름 없이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소들까지 고루 호출하며 시인은 ‘장소의 기억’을 통해 개인의 그리움과 공동의 시간을 겹쳐 보이게 한다. 그래서 시구들 속 절창은 무릎을 ‘탁’치게 할 만큼 진한 에스프리(esprit)를 전한다. ‘폐사지 적막한 그늘 속에/ 허공이 된 마음 의탁하네/ 사는 것은 눈물길/ 누가 이곳에 와 끊어진 길 다시 잇고 있나/ 누가 제 덤불 같은 마음속 무기를 묻어두고 갔나/ 서걱서걱 칼을 갈던 무장산 억새들도/ 무장해제하는 가을날/ 갑옷 투구 모두 벗어 던지고/ 흰 머리 나부끼며 그대 손짓하는 그리운 길//’ -시 ‘무장사지에서 그리움을 탁본하다’ 중에서. 시집의 제목처럼 ‘탁본’은 중요한 시적 은유다. 돌에 새겨진 글자를 종이 위로 옮기듯 시인은 삶의 파편과 시간의 흔적을 조심스레 떠내려 시의 언어로 남긴다. 이 과정에서 상처는 삭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한 결을 얻는다. 경북 영천 출생의 황영선 시인은 199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평사리문학대상, 매일신문 신춘문예, 눈높이 아동문학상, 경주문협상, 경주문학상, 경북문협 작품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경북문협·경주문협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 ‘우화의 시간’, ‘이슬도 풀잎에 세들어 산다’를 비롯해 동시집 ‘웃음 빵’, eBook 시집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꾸준히 펼쳐왔다.황영선의 새 시집 ‘그리움을 탁본하다’는 시인이 삶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상처와 그리움 속에서도 인간과 세계를 향한 화해의 언어를 세워가는 여정이 담겼다. 고요한 문장들 사이로 번져 나오는 따뜻한 울림은 독자들에게도 오래도록 남을 위안과 사유의 시간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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