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창밖으로 산이 보인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차경(借景)’이라 부른다. 우리 조상들도 과연 자연을 ‘빌려온다’고 생각했을까.   9월 10일 경주에서 한옥문화박람회가 열린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오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때, 한옥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못지않게 한옥을 어떤 생각과 언어로 설명해 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차경은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중국 명나라의 원림서 『원야(園冶)』에서 체계적으로 다루어진 조원(造園) 개념이다. 쑤저우 졸정원은 멀리 떨어진 북사탑(北寺塔)을 정원의 경관 속으로 끌어들인다. 일본 교토의 슈가쿠인 이궁도 주변 산을 정원의 배경으로 삼는 대표적인 차경 사례다. 일본 정원에는 자연이나 명승을 축소하여 정원 안에 재현하는 축경(縮景)의 전통도 있다. 그 자체로 비할 바 없는 공간문화다. 문제는 그 언어가 과연 우리 건축의 자연관까지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우리 앞의 산은 건축을 위해 거기에 있지 않았다. 강 또한 정원이 되려고 흐르지 않는다.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흘렀다. 사람은 그 자연 안에서 자리를 찾고 집을 지었다. 자연을 내게로 끌어오는 것과 내가 자연 속에 머무는 것은 다르다. 그 이치를 이문열의 소설 『시인』에서 깨닫는다. 김삿갓 김병연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의 말미, 고향 영월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들 익균은 몇 번이고 아버지를 잃어버린다. 나무 그늘에서, 개울가에서, 바위 위에서 아버지가 사라진다. 그런데 사실 김삿갓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주위의 풍광과 너무도 어울린 나머지 아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김삿갓이 있는 자연이 더 자연스러운 경지이다. 담양 소쇄원에도 같은 모습이 있다. 정자를 세우고 담을 쌓고 물길을 튼, 분명 사람이 만든 공간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사람의 의도이고 어디부터가 본래 자연인지 경계를 긋기 어렵다. 손을 대되 손댄 흔적을 덜고, 자연의 결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작위적 작위(無作爲的 作爲)’라 하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연을 깊게 보고 자연에서 생각을 빚어내는 경지이다. 『시인』에서는 사람이 자연에 동화하고, 소쇄원에서는 사람의 손길이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차경은 외부 경관과 건축공간의 시각적 관계를 설명하는 분석용어로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우리 조상들이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했던 고유한 언어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20세기에 들어와 건축·조경 연구자가 중국 원림 이론으로 우리 전통 공간을 해석하면서 그대로 따온 말이 아닌가 묻게 된다. 문제는 설명을 위해 빌려온 언어가 어느 순간 자체 문화개념처럼 굳어지는 데 있다. 식자들이 익숙한 용어를 되풀이 사용하는 동안, 정작 우리 건축이 자연을 대했던 태도가 어떻게 읽히는지 성찰할 일이다.   ‘借’, 빌린다는 말에는 나와 대상의 구분이 먼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은 산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 산자락에 들어가 살았기 때문이다. 건축은 자연을 자기 안으로 편입하기보다 자연이라는 더 큰 질서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찾았다. 한옥의 창도 자연을 끌어들이는 액자라기보다 자연을 향해 눈을 열고 마음을 여는 틀이라 하겠다. 한옥문화박람회가 재료와 기술, 산업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한옥을 바라보는 생각과 언어까지 돌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조상은 결코 자연을 빌리려 하지 않았다. 내가 자연에 담기고, 자연을 내 마음에 담고자 했을 뿐이다. 한옥이 품어온 이 오래된 자연관, 오늘의 건축이 새겨갈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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