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 자라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의 긴 시간을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퇴직 후 그동안 닫아두었던 시골집을 간간이 드나들며 먼지도 떨고 정리도 하며 며칠씩 머물다 오곤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농사라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이것저것 작물을 키우는 데 관심이 갔습니다. 마당에 텃밭을 일구어 재미삼아 심어둔 모종이 사람이 살뜰히 돌보지 않는데도 스스로 자라 너풀대도록 상추가 자라고 방치한 쑥갓이 자라 꽃을 피워 쑥갓꽃이 저리도 어여쁘단 걸 알게 합니다. 풋고추며 가지, 방울토마토가 넘치도록 달려 여기저기 나누어 먹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봄이면 시장 좌판에 놓여 있던 시든 야채 묶음이 고구마순이란 것도 알게 되어 들에다 고구마도 심어 보았지요. 그런데 멧돼지란 불청객에게 된통 당하고 허망하던 차에 향이 강한 식물을 옆옆에 심어두면 멧돼지가 싫어해서 오지 않는다기에 올봄에는 씨를 싹틔워 들깨모종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 불청객들이 먼저 와서 다 파헤친 고구마 두둑에는 거둘 것이 하나 없고, 잊고 있던 들깨는 사람과 키를 겨눌 정도로 무성히 자라 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들깨를 자르고 단으로 묶어 이웃이 일러준 대로 나란히 세워서 말렸습니다. 다음 단계를 어떻게 진행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걸 본 이웃집 할머니가 조근조근 순서를 일러주며 고맙게도 필요한 도구까지 갖다 줍니다. 할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마당에 넓은 비닐을 깔고 막대기를 들어 들깻단을 두들깁니다. 먼지를 뒤집어 쓰며 들깻단을 두드리다 보니 문득 감태준 시인의 시 ‘참깨를 털면서’가 생각납니다. 도시인인 시속 화자가 시골에서 할머니를 도와 참깨를 텁니다. 할머니는 막대기질을 슬슬 하지만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손자인 화자는 힘껏 내리칩니다. 게다가 솨아솨아 소리 내며 쏟아지는 참깨들에 신이 나서 더 세게 내리칩니다. 그러는데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참깨를 털면서(감태준)’의 마지막 두 행) 일을 빨리 끝내려고 그저 힘으로 내리치는 화자와 달리 할머니는 열매의 꼬투리가 떨어지지 않게 참깻단을 조근조근 텁니다. 젊은 화자는 빨리 결과를 얻고자 조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만 할머니는 참깨를 터는 과정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참깨에 재미를 느낀 젊은 화자는 그 재미에 취해서 참깨꼬투리가 떨어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막대기질을 합니다. 아직 젊어서 자신이 얻을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화자와 달리 세상을 살아온 할머니는 타자에게서 취할 것을 취하더라도 타자의 자리도 살피는 삶의 순리를 깨우칩니다.   시골 이웃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들입니다. 마을회관에서 모여 놀다가 저녁 무렵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안노인들이 하나같이 ㄱ자로 굽은 허리를 하고 다들 유모차 비슷한 보행기를 각자 하나씩 밀고 갑니다. 그 모습에 그들이 살아온 고된 노동의 나날이 겹쳐 보입니다. 낡고 누추한 외양과 달리 몇 마디 말을 나누노라면 무심한 듯 툭툭 뱉는 말이 삶의 지혜를 담아 보입니다. 정직하게 살고 정직하게 노동하며 늙어온 이들에게서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저렇게 털어 봐야 한 되 택이나 얻을까 시뻐하던 마음을 비웃듯이 들깻단 대여섯 묶음을 탈탈 털고 이웃 할머니가 빌려준 체에 쳐서 한 말은 좋이 넘는 알곡을 거뒀습니다. 뜻밖의 소출을 얻는 마음이 퍽 들깨를 거두면서 기쁩니다. 쳇눈이 너무 촘촘하면 검불이나 깍지 따위의 불순물은 잘 걸러지지만 들깨알이 통과하기 어려워 얻는 것이 줄어듭니다. 둠벙에 고기를 잡으려고 눈이 너무 촘촘한 그물을 치면 잔챙이를 거르기는 수월하지만 잔챙이 속에 섞인 쓸 만한 고기도 얻지 못하게 되겠지요. 나이 들수록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내가 바깥세상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깨닫게 된 것은 들깨를 거두면서 얻은 또 다른 소출입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