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의해 모처럼 자신을 응시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창궐로 사회적 거리가 제한되자 은둔의 일상이었다. 이로 인하여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대적하노라니 심신이 지친 반면 이율배반적으로 얻은 것도 적지 않다. 그동안 "바쁘다" 라는 말을 입에 달았던 습관이 어느 사이 고쳐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이 마냥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만은 아닌 성 싶다.  순백의 흰 눈을 밟으며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지혜를 얻기도 했다. 향기 그윽한 매화 꽃그늘 아래서 나뭇가지마다 움트는 아기의 젖니 같은 연둣빛 새순을 바라보며 희망을 꿈꾸었잖은가. 하릴 없이 녹우綠雨에 젖으며 까닭모를 그리움 때문에 가슴이 재도 없이 타들어가는 초토막이 되어보기도 했다.   가을바람에 포도鋪道 위를 나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인생의 참의미를 곱씹기도 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시국 속에서도 오랜만에 마음의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로소 `유유자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공감하는 순간이었잖은가.  그동안 쫓기듯 살아온 삶은 오롯이 필자 성격 탓이었다.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미리 준비하였다. 하여 오류를 범하였고 실수도 잦았잖은가. 제대로 행하지 못할 경우엔 스트레스로 불면에 시달리기 예사였다. 뿐만 아니라 때론 불의不義와 적당히 타협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정도正道만 걸으려고 했다. 외골수로 고집도 세어서 세운 뜻을 좀체 꺾을 줄 몰랐다. 그러나 집안에서 칩거 기간이 길어지자 이런 성향도 다소 희석되고 한편 느긋해진 기분이다.  돌이켜보니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삶은 욕심보따리 채우는 일로 점철된 듯하여 갑자기 부끄럽다. 물질보다 소중한 게 있으련만 그것을 놓친 채 눈에 보이는 현상만 우선시 하며 살아온 듯해서다. 아무리 높은 지성과 올곧은 철학을 가슴에 지닌들, 그것이 한낱 겉치레에 불과하다면 마음의 가난이 아니고 무엇이랴. 참으로 남루한 삶을 살면서도 정작 그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치 없는 삶인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 우매함을 비로소 코로나19 창궐로 말미암아 집안에 심신을 가두면서 깨우친 것이다.   이렇듯 지난 삶에 대한 성찰로 황폐해지고 메마른 마음자락에 습윤濕潤을 얻자 `마음은 곧 성격`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이제라도 마음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 때 문득 학창 시절 읽었던 세계 명작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 에서 "세계가 무대다. 그리고 모든 남녀는 배우다" 라는 내용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삶이 셰익스피어 표현대로라면 그 삶을 가름 하는 것 역시 성격이지 싶었다. 해서 그 당시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유형을 나름대로 분류 및 정의를 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남의 말에 솔깃 하는 귀가 얇은 무장 오델로는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인하여 스스로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졌잖은가. 권력을 향한 헛된 욕망에 내몰린 맥베스였다. 어리석음이 비극을 부른 리어왕, 내성적이고 회의적인 햄릿까지 셰익스피어 극劇의 주인공들은 전부 자신의 성격으로 인하여 몰락을 자초했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에서도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불행은 오이디푸스의 성격에 의해서였음을 간파하기도 했다. 매사 경솔하고 부주의 하며 화를 잘 내는 면을 간과할 수 없어서였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선 `사람의 성격을 평가하는데 가장 정확한 척도는 정권을 잡았을 때 행동`이라고 했다. 이 내용을 상기하자 처칠의 유연한 성격에 존경심이 인다.   1941년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마음먹은 하루 전 날 처칠은, "히틀러가 지옥을 침범한다면 난 악마한테 가서 온갖 아양을 떨겠다"라고 말했잖은가.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오랜 이념적 적대자인 스탈린과의 동맹도 망설이지 않았었나 보다.   일명 돌싱들 이혼 사유 1위가 배우자의 `물과 기름` 같은 성격이란다. 나이 탓인지 필자도 남녀의 훤한 인물보다 성격 좋은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이게 아니어도 이제 곧 지방 선거 바람이 한바탕 불어온다. 이번에도 위에 언급한 플루타크 영웅전의 내용을 다시금 비쳐보게 해선 알 될 일이다. 국민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정치인에게 향후 더는 실망하는 일이 없었음 한다.   처칠처럼 부드럽고 진정 국민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성품의 정치인이라면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까. 원만한 성격이야말로 정치인의 훌륭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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