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사온 노란 병아리 두 마리를 기른 적 있다. 이 병아리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필자 뒤를 따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이 병아리들이 유달랐던 것은 필자가 마당만 나가도 용케 알고 필자 뒤를 졸졸 뒤따라오곤 해서다.  요즘도 어린 날 필자 품속에 부리를 묻고 졸던 노란 병아리가 가끔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런 병아리에 반하여 심지어는 병아리를 가슴에 품고 이불 속에서 함께 잠들곤 했었다.  하물며 병아리도 이러할진대 주인에게 충직하고 재롱부리는 반려 견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이런 마음에서인지 새벽 호숫가 조깅을 나가면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운 사람, 처네로 업은 사람, 끌어안고 걷는 사람 등 호숫가 일대가 사람 반, 개 반 그야말로 개 판(?)이다.  필자도 동물을 무척 아끼고 좋아한다. 한동안은 닭고기 및 오리 고기 등을 입에도 안 댄 적 있다.  오죽하면 세 딸들이 자신들 어렸을 때 통닭 시켜 먹는 친구가 마냥 부러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가금류 고기 식용을 꺼렸다.  이유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웃집에서 살아있는 오리를 잡는 것을 본 후 적잖이 놀라서이다.  여름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영희 아버지는 시장에서 오리를 살아있는 채로 사갖고 왔다고 했다. 그것을 잡아 오리 탕을 끓일 테니 자신의 집으로 오란다.  호기심 많았던 필자는`살아있는 오리를 영희 아버지가 어떻게 잡을까?`궁금했다. 서둘러 어머니를 따라 영희 집에 가보니 답답한 듯 오리는`꽥꽥`거리며 자루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때 영희 아버지는 자루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오리를 꺼내더니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로 오리의 목을 단숨에 내리쳤다.  순간에 목이 잘린 오리는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몸통 만 잽싸게 마당 안을 이리 저리 뛰기 시작했다.  오리가 목이 잘렸는데도 어찌 그토록 날쌔게 마당을 잘 달리는지 이즈막도 그게 못내 궁금하다.  하지만 그때는 목 잘린 오리 몸통이 뛰는 일 보다는 식칼로 그것의 목을 내리는 치는 영희 아버지의 잔인한 손놀림이 참으로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리고 목이 잘린 채 앞을 향해 내달리던 오리 몸통이 꿈에 보일만큼 애처로웠다. 이 후로 복 날이 와도 삼계탕은 물론 오리 고기는 어린 날의 그 기억이 떠올라 입에 대지 않았다.  인간은 약육강식에 익숙해져 있다. 돼지, 소 , 토끼를 비롯 하물며 말고기까지 먹잖은가.  하지만 이 세상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잔디를 깎거나 풀을 벨 때면 풋풋한 풀내음이 진동한다.  사실은 그 풀 냄새도 어찌 보면 풀들이 잘려나가며 방어기제로 내는 내음이 아닐까.  한 때는 복날만 돌아오면 개들의 수난이 당연시 됐던 시절도 있었다. 보양식으로 개 보신탕이 으뜸이라며 일명 영양탕 집엔 많은 손님들로 북적 거렸다.  그 주재료가 개고기가 아닌가. 시골 다리 밑이나 큰 나무에 개를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내리치는 도살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인 개를 모닥불 위에 올려  털을 그을리는 냄새는 참으로 지독했다.  요즘 이런 일이 행해진다면 동물학대로 법을 위반되고도 남는 행위다.  대형 마트나 동네 마트만 나가보면 요즘 개의 사료들을 쉽게 대할 수 있다.  홍삼 재료를 첨가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온갖 비타민 무기질 등이 함유된 고급 사료도 즐비하다. 어찌 사료뿐이랴. 앙증맞은 강아지 원피스, 심지어 바지 등 반려 견 용품들도 고급화이다.  또 있다. 주인이 수일간 집을 비울 때면 쾌적한 공간에 제 때 먹이 및 목욕까지 시켜주는 개 호텔도 성업 중이다.  `정승 집 개 팔자`혹은`오뉴월 개 팔자`를 떠올리지 않아도 더위에 시달리는 서울 쪽방촌 사람들보다 호강하는 게 반려 견들이다.  하긴 동물인 개 사회에도 오륜五倫이 있을 정도라니…. 이런 면을 보면 개가 누리는 호사는 당연 하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지나치려나.  윤희본 씨가 지은 `진돗개 이야기`에서 읽은 글 내용이다. 지주불폐(智主不吠)로써 주인을 알아보고 짖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으로 치면 군신유의(君臣有義)에 해당한다고 할까. 또 하나가 소불대적(小不大敵) 으로 큰 개는 작은 개와 안 싸운단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 말할 수 있다.  모색상사(毛色相似)로 새끼가 애비 털빛을 닮았다는 말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의미하잖은가.  어울릴 시기가 아니면 피하는 유시유정(有時有情)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뜻하며 한 마리의 개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따라 짖는 일폐중폐(一吠衆吠)는 붕우유신(朋友有信)에 해당 한다.  그러고 보니 윤리와 도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사는 인간보다 나은 게 개 사회 아닌가.  이 탓인지 헛된 죽음을 일러`개죽음 당했다`라고 개의 죽음에 빗댄 비하의 말도 이젠 정정해야 할까보다. 개가 수명을 다하면 무덤까지 마련하며 비통한 표정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라고 애통해 하잖은가.  굳이 `오수의 개`를 들먹이지 않아도 개가 인간 못지않게 대접 받는 이유를 개 사회의 오륜을 살펴보니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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