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영향인지 지금은 약간 주춤한 듯 하지만 한때 제주 올레길 걷기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습니다. 너도나도 제주를 찾아 올레 1코스부터 21코스까지 중에서 마음이 끌리는 코스를 걷고 자신의 SNS에 인증 샷을 올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나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가 되어 두세 곳의 올레 코스를 걸었지만 워낙 페ㅇㅇ북이니 카ㅇㅇ스토리니 하는 SNS에 서툰 문외한이니 인증 샷까지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 눈을 감고 `가파도 올레`의 보리밭과 바다와 하늘이 만든 푸른색의 향연을 떠올리면 잠시나마 현실의 시공간을 벗어나 제주로 가서 길을 걷던 그때의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올레`라는 제주 방언은 통상적으로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진 좁은 골목`이라는 의미로서 엄밀히 말하자면 `제주 올레`는 사전적 의미의 올레가 아닌, 걷기 여행이라는 취지에 맞게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며 개발된 트레일인 셈입니다. 제주 출신의 한 언론인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뜻 있는 지인들과 더불어 올레길을 개발하고 관리할 민간단체를 만들어 추진한 트레킹 코스입니다.  올레길 걷기가 열풍을 일으키자 이후 산림청이나 국토해양부 등 정부 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투어 둘레길, 숲길, 걷기 길을 만들어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현재 538개의 트레일 코스가 있다고 합니다.(한국관광공사 걷기여행 정보서비스 `두루누비` 참고)  길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예산을 배치한 정부 부처나 지자체가 단체의 의미를 담아 길 이름을 명명하다보니, 심지어 하나의 걷기 길이 여러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해안 해파랑길의 막바지 코스인 강원도 고성의 송지호에서 화진포까지의 구간은 해파랑길이라는 이름 외에도 관동팔경 녹색경관길, 해안누리길, 산소길, 평화누리길 등 여러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앞서 언급한 `두루누비`의 정보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동해안을 따라 주욱 이어진 해파랑길, 땅끝마을에서 서해안을 따라 조성된 서해랑길, 남해안을 종주하는 남파랑길, 강화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진 DMZ 평화의 길이 완성되어 한반도 남쪽의 외곽이 하나로 이어지는 약 4,500km의 장거리 걷기여행길인 코리아둘레길로 완성되었습니다.  경주에도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오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추령재에서 천년 사찰 기림사로 이어지는 `왕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길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는 유언에 따라 그 아들인 신문왕이 감포 수중릉에 장례를 지내러 가던 길이었을 겁니다.  신문왕은 가파른 토함산 길과 추령재를 피해 산세가 비교적 순한 이 함월산 아랫자락 길로 행차하여 아버지의 능을 다녀오곤 했을 것입니다. 왕의 길은 가는 도중 곳곳에 모차골, 수렛재, 말구부리와 같은 지명들이 신문왕의 마차가 지나다녔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쉬지 않고 이어달리기하듯 피는 야생화들과 한여름에도 그늘이 짙은 숲길, 신문왕의 옥 허리띠 한 조각이 물에 닿아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설화를 담은 작고 아담한 용연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편도 4km정도의 길은 가는 내내 신라 천 년의 역사를 소곤소곤 들려줄 것입니다.  길은 사람이 만듭니다. 아무리 험한 벼랑길이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은 또 사람들을 어딘가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게 길은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무성한 수풀에 묻혀 버려진 길이 되고 쓸쓸하게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우리나라의 걷기길, 둘레길, 숲길, 해안길 중에서도 처음 만들어질 당시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점차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유명무실하게 버려진 길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동해로 넘어가던 신문왕 호국행차길이 지금의 `왕의 길`로 거듭 날 수 있음도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고 묵혀지지 않도록 누군가 잘 관리해 준 덕분일 겁니다. 이번 늦가을에 아름답게 단풍든 왕의 길을 걸으며 신라의 향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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