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뜻해서 서천 천변을 좀 걸었습니다. 얼굴에 닿는 바람 끝이 아직은 약간 싸늘해도 공기는 이미 봄을 품고 있습니다. 멀리 게이트볼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입은 밝은 빛깔의 옷들이 형형색색의 꽃이 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봄 냄새가 납니다. 어디서 꽃 향기도 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것 참, 진짜 매화꽃이 피었더군요.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데 부지런한 매화 한 그루가 가지마다 이른 꽃을 달고 있습니다.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물새들과 오리 떼는 자맥질 하며 먹이를 찾고 공기는 따스하고, 마치 풍경화 한 폭인 듯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상을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큰 변화나 새로운 사건이 없이 때로 지루하기조차 한 일상이지만 만일 이 일상의 리듬을 깰 일이 갑자기 생긴다면 어떨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평온한 시간을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사건에 의해서 빼앗길 수도 있을까요?   간혹 안정된 생활에 큰 변화가 없는 나날의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어떤 스펙타클한 일이 생기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합니다. 가령 엄청난 액수의 복권이 당첨된다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거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성공을 이룬다든지 나날의 권태로움을 깨뜨려 줄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이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그처럼 당연하고 덤덤한 일일까요?   일상의 범위를 사회와 세계로 확대하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이 매일매일 생겨납니다. 교통사고, 화재, 살인 사건, 홍수, 화산 폭발, 지진, 시위, 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고 인명이 손상되며 일상의 평온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최근 튀르키예의 지진 소식에 지구촌 식구들이 모두 안타깝고 아파하는데 오늘 또 다른 지진 소식이 들립니다. 타지키스탄과 중국 접경 지역에서 진도가 7이 넘는 지진이 발생했다는군요.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으로 이미 4만 4천여 명이나 목숨을 잃고 아직 무너진 잔해에 매몰되어 찾지 못한 사람이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합니다.   지진으로 건물은 무너지고 전기, 수도 등 기반 시설이 파괴되어 밤을 보낼 집이 없고 먹을 것과 식수를 구할 수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다합니다. 일 년 넘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민간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어 비록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도 당장 하루하루의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하고 언제 적의 공격이 닥칠지 모를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 소식들을 접하면 그들의 아픔을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미국 다트머스 대학의 도넬라 메도스 교수가 쓴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란 글이 있습니다. 글쓴이는 세계는 나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간임을 일깨우며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세계 인구를 100명으로 축소시켜 인구, 종교, 언어, 문맹률, 생활환경, 영양실조와 위생, 가난 등의 통계를 쉽게 풀어 썼습니다.   그에 비추어 보면 기아로 굶주리지 않고, 에너지를 마음 대로 쓸 수 있으며,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고, 은행에 약간의 예금이 있고, 자동차가 있는 7명 안에 드는 나는 참 부유한 사람입니다. 또 대학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리고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할 자유를 누리고, 공습이나 폭격, 살육과 강간과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사는 혜택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튀르키예나 우크라이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내가 당연히 누리는 혜택이 그들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될 것입니다. 100명이 사는 세계 마을에서 내 곁의 이웃이 일상적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외면하고 혼자만 안락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을 구성원들이 다 같이 평온할 때, 내 일상의 평화도 진짜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작은 도움이라 할지라도 손을 내밀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라도 나눌 수 있어야 이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온 마을이 평화롭고 ‘벌써 매화가 피었더군요.’하는 일상적인 인사를 편하게 나눌 수 있을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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