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굴욕`과 `을사보호조약(일명: 을사늑약)`과 `계묘늑약`이 윤석열 정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1637년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이야기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말하려면 조선의 518년 역사에서 258년간이 청나라 조공국이 이씨조선이었다는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거슬러 가서 말해야 하고 `을사보호조약`의 전말을 말하려면, 일본의 침략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는 없으나, 무조건 일본을 증오하고 강제징용을 말하기 이전에 망국을 자초한 대한제국 말기의 피폐했던 당시 상황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됨으로써 소위 일본의 이토오와 청나라 전권대사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조약의 전말도 말해야 한다.  이 조약에서 비로소 청은 258년간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한 암울했던 이씨조선의 역사를 말해야 하고 또 `을사보호조약`을 `을사늑약` 또는 `계묘늑약`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왕 고종이 44년간을 권좌에 있으면서 망국의 길을 자초한 원인을 말해야 한다.  거기에 대한 진실은 차고 넘치지만 대표적인 한 예를 들라면 광화문 네거리 칭경비에 얽힌 사연을 보게 되면 얼마나 고종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증명해 준다.  1902년 자신의 즉위 40년을 축하하기 위한 칭경비는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 들었다.  그 해 조선의 국가 총 예산이 800여만원 이었으니 예산의 8분의 1이 잔치비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나약해진 조선의 모습을 읽고 있던 주변의 열강들은 호시탐탐한 조선을 넘보는 탐욕은 날로 더해가고 나라는 백척간두에 섰지만 고종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이러한 망국의 사치는 3년 뒤 일본에게 외교권을 넘기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고 5년뒤(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의 역사는 종말을 맞았다.  그뿐 아니라 1904년에서 1905년 조선과 만주의 주도권을 두고 벌린 러, 일 전쟁에서 이유야 어떠했던 일본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그동안 대한민국은 어렵고 고달픈 지난 역사를 극복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 발전의 축으로 채택한 결과가 작년(2022년) 세계 무역 7위권의 기적을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지난 역사를 가정법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있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반세기 남짓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적을 이룬 예외의 나라다.  당시 러, 일 전쟁에서 만약 일본이 패전하고 공산국가인 러시아가 승전국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싹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다.  현실을 보면 무엇을 더 말하랴. 북한의 저 일인 독재 체제하에서 신음하는 2500만 인민들, 그리고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1년 여간 벌어지고 있는 저 전쟁의 참상을 이재명 대표님 `삼전도 굴욕`이니 `을사늑약`이나 `계묘늑약` 같은 암울했던 지난 역사를 오늘에 끌고 와서 논리에 계합되지 않는 선동으로 12년 만의 한일 정상회담을 방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친일이니 반일이니 하면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증오와 선동을 멈추십시오.  이 지구행성 위 생태계의 역사는 약육강식이라는 전쟁의 역사이고, 어느 나라이든 고달팠던 지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 않은 나라가 어디에 있나요?  친일, 반일 하면서 감정을 부추겨 일본에다 돌을 던지면 그 피해는 일본과 일본국민들이 아니고 일본에서 뿌리를 한국에 둔 재일 한국인 일본 국적자와 한국 국적 보유자 50만명을 포함한 최대 400만명이 그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당리당략에만 몰두해서 대한민국의 비전에 발목만 잡으려 했다는 비겁한 민주당 대표 이재명이라는 오명(汚名)을 역사에 남기려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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