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152번지에 가면 비운의 세자 의안대군 방석의 묘가 있다. 의안대군(1382∼1398)은 태조이성계의 8번째 아들로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 개국 초 왕자들의 세자책봉을 함에 있어서 개국공신 배극렴과 조준 등은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5남 이방원을 지지했으나 정도전, 남은 등은 처음에는 강씨 소생의 장남 이방번을 내세우다 그의 성격이 세자로써 불합리하다하여 둘째 이방석을 천거하여 관철시켰다.    이에 본처소생 이방원(1367~1422)은 불만을 품고 계모 강씨와 그를 지지했던 정도전, 남은 등과도 원수지간이 되었고 여기에 아버지조차도 계비강씨와 세자 편을 들었다. 이렇게 살얼음판이었던 정국에 균형이 깨진 건 1396년 8월 13일 계비 강씨가 갑자기 죽으면서 시작된다. 이방원은 1398년 드디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고 정도전, 남은 그리고 세자의 장인인 심효생까지도 죽여 버린다. 이방원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 4) 신진사대부 정몽주를 제거하면서 부터다. 정몽주를 철퇴하고 이어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으며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에는 1, 2차 왕자의 난 모두 이방원이 아닌 그의 정적이 먼저 난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이를 제압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편이라 했던가 2차 왕자의 난도 그의 형 방간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이방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57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자식들 간의 골육상잔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왕위를 두고 형제들끼리 죽이는 비극적인 모습을 본 태조는 1398년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집권하고 아버지로부터 왕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위해 아버지를 궁으로 모셔오기로 했지만 태조는 몸서리쳤던 한양을 생각하며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어 연달아 함흥으로 신하를 보내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활로 쏴 죽이는 등 요지부동이었기에 이를 두고 ‘함흥차사’란 말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이 묘역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1823년(순조 23) 후손들에 의해 위치가 확인되었고 1999년 무덤을 새로 단장하였으며 의안대군은 위쪽, 부인 심씨는 아래로 하여 상하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또한 이 묘역은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지닌 조선초기의 것으로 돌담이 있고 봉분은 직사각 모양의 호석이 둘러져 있어 한강이남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어린 세자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무학대사에게 쓸 만한 묫자리 하나 잡아주도록 일렀고 이 묘역은 무학대사가 소점한자리로 나름 명혈지에 속한다. 혈장 뒤 용맥은 살아있는 생룡으로 지현굴곡을 하였으며 좌우의 청룡백호도 잘 감싸주고 혈장 바로 뒤에는 암반이 박혀있어 위에서 내려오는 기운을 모았다가 혈장에 잘 공급해준다. 풍수고서에서도 혈장 위에 박혀있는 돌은 귀성(鬼星)이라 하여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이를 혈의 증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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