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멀리 와서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주소가 없느니”   이하석 시인이 열네 번째 시집 ‘기억의 미래(문학과지성사)’를 내면서 읊조리듯 말했다. 1971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시력 50여 년을 넘어선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그간 갈고닦은 세월만큼 담담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이 세계의 음지를 응시한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조합한 제목 ‘기억의 미래’에서 그간의 시 세계를 잇고 확장하는 동시에 여전히 스스로를 갱신하는 시인 이하석의 ‘낯선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시인은 2015년 ‘연애 間(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며 ‘기억’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한 시들을 묶어낸 바 있다. 기억을 기록하는 이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정확한 문장으로 응시하는 시인의 원숙한 내면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그로부터 8년 후, 시인은 한층 넓어진 시선과 깊어진 사유로 ‘기억의 미래’를 노래한다. 과거에 갇혀 있는 기억의 한계를 넘어 그다음 날들을 꿈꾸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시집은 모두 5부로 나눠 구성됐다. 1부에서는 밝은 교신/페트병/갈대/폭포의 시/블루 콤마/조협皁莢/최소 2미터 거리를 유지해주세요↑ 등이, 2부에선 분꽃/민들레 골목의 시/제비꽃/방천시장/푸른 문 등이, 3부에선 가창댐 아래서/세워지다/서로/5월/두툼한 손 등이, 4부에선 누워 있는 여자/불탄 뒤/낙화에 대하여/이별이 있고 나서 무성해졌다 등이, 5부에선 뒤늦은 처음/낯선, 시/시선의 기척/수니 등의 시를 엮었다. ‘블루 콤마의 주인도 내다보는 자에 속하지만, 자주 카/ 페 밖으로 나가 강변 풍경이 되어서 담배를 피운다.  ...중략... 하지만 결국,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울컥해진다//’ -시 ‘블루 콤마’ 부분. 문학평론가 김문주는 시 ‘블루 콤마’에서 시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모두 보는 주체이자 대상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인간 중심의 위계적 감수성이 사물의 시각에 자리를 내어주고 풍경의 세계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인식의 전환은 문명 비판적 사유나 생태적 상상력에 국한하지 않는 이하석의 시 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고통을 아름다운 언어로만 좌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특히, 이번 시집의 3부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려낸다.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을 ‘가창댐 아래서’와 ‘가창댐’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자장가’ 등으로 추모하고 기념하는 시편들은 현대사의 비극 앞에서 ‘고스란히 눈 뜨고자’ 하는 시인의 단호한 결의를 ‘호명 2’ 등에서 증언한다.시인은 또 ‘우포늪’, ‘개’ 등에서 삶의 뒤편에 숨겨진 고요한 곳, 즉, 쓸쓸하고 적적한 곳들을 일부러 찾아가 그곳의 숨겨진 생기를 들춰낸다. 이는 시인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폐허의 적요가 피우는 꽃’이 되어 삭막한 음지를 밝힌다. 이러한 시인의 자성은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낯선, 시’)이란 오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하석 시인은 경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투명한 속’, ‘것들’, ‘향촌동 랩소디’, ‘연애 間’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유리 속의 폭풍’, ‘환한 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도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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