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 46-1번지에 가면 조선 인조임금의 셋째아들이고 효종의 친동생인 인평대군(1622~1658)의 묘가 있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두 형들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고 귀국 후에도 사은사로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형 효종은 즉위 후에도 혈육의 동생인 인평대군을 잘 챙겼고 그의 아들들도 총애하였으며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하나뿐인 동생이라 매우 반겨주었고 효종의 아들 현종 또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삼복 형제들을 잘 대접하였다. 인평대군에게는 복녕군, 복창군 복성군, 복평군의 네 아들이 있었지만 맏아들 복녕군이 32세의 나이에 죽고 나머지 3명은 숙종 때 역모를 꽤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 숙종의 외척들은 이들 3형제의 외숙부들이 남인정권의 실세들이라 늘 경계를 하였고, 혹시 숙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왕위가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제거하게 된 것이다. 효종과 인평대군의 남달랐던 형제애는 인평대군의 묘지명에도 잘 표기되어 있다.    묘지명에는 1658년 1월에 감기에 걸려 여름이 지나도록 낫지 않으니 효종이 공의 집에 친히 왕림하였다. 공이 병든 몸을 이끌고 옷깃을 여미어 임금을 맞이하니 효종께서 그의 초췌한 얼굴빛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저녁 해가 저문 뒤에서야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5월 13일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효종은 몹시 놀라 곧장 달려왔으나 이미 숨을 거둔 상태라 시신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적고 있으니 평소 이들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장사일자에 효종은 직접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가 지은 제문에는 어려서부터 함께 놀았던 즐거움과 중년에 해어지고 만난 정을 모두 서술하였으니 듣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서·화에도 능해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과 비유되기도 했으며 사후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 포천시의 왕방산(736.8m)을 일으키고 여기서 동북방으로 뻗어나간 용맥이 원수봉(403.9m)을 거쳐 덕령산(350.5m)을 일으킨 후 계속 뻗어 혈장 뒤 금성체의 현무봉을 만들었다. 현무봉에서 혈장까지는 지현굴곡을 하였고 용맥의 끝자락인 용진처에 묘소가 있어 생기가 왕성한 곳이다. 묘소 양측에는 청룡백호가 겹겹이 잘 감싸주고 있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있으며 수세도 좌선용에 우선수로 합법하다. 풍수가에선 이곳 전체의 형세를 보고 마치 귀인이 단정하게 앉아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귀인단좌형이라 부른다. 이 묘소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아들들이 모두 참변을 당하자 후손들은 인평대군의 묘소가 흉지에 모셔진 탓이라며 숙종 19년(1693)에 이곳으로 이장을 해왔다. 그런 후 후손 중에 남연군과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고종과 순종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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