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有名 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故 常無欲以觀其妙(고 상무욕이관기묘)常有欲 以觀其徼(상유욕 이관기요)此兩者(차양자)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同謂之玄(동위지현)玄之又玄(현지우현)衆妙之門(중묘지문)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1장의 전문(全文)입니다. 도덕경의 구성은 약 5,000자, 8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을 「덕경(德經)」이라고 합니다. 도덕경 전체 81장 가운데에서 제1장이 해석이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학자(諸學者)들의 견해에 따른 여러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필자의 견해로 한 줄씩 풀어보겠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道: 유가의 도, 인간들이 스스로 그리는 도)를 도(道)라고 말할(定義)수 있다면, 그 도(道)는 진정한 도(道: 道家의 심오한 道)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道)는 말로 설명할 수 있거나 글로 개념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도(道)는 정의(定義)될 수 없습니다. 우주(宇宙)의 오묘한 질서를 인간의 눈으로는 볼수 없습니다. 빅뱅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관념속에서 빅뱅을 그리고 도(道)의 이데아(idea)를 그려볼 뿐 입니다. 도(道)는 오로지 개별자의 마음속에 위치해 있을 뿐입니다. 혹자(或者)는 이것을 두고 ‘신(神)의 영역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이 세계에는 우주의 별 만큼의 무수한 도(道)가 존재합니다. ·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이름(儒家의 핵심 이름들 : 仁, 義, 禮, 智, 信의 五常등)을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름은 진정한 이름(道家의 심오한 이름들: 道家의 道, 無, 有, 妙, 徼, 玄등)이 아니다. 사물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칭(稱하고 정의(定義)내리는 순간 그 이름은 진정한 이름(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도(道)의 심오한 영역을 우리가 ‘도(道)’라고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는 도(道)의 개념에서 이탈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고유의 이름이 시작점부터 붙여져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도 이름이라는 것도 “단지 편의상 필요에 의해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며, 그 이름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명칭 입니다. 지구 중심의 ‘지구계’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이름은 단지 이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붙이기 나름입니다. 이름에 탐착하지 말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상(虛相)에 붙들려 있지 말고 실상을 바로 보고 무명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천지(天地)의 시작은 무(無)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주의 첫 시작은 ‘무(無)로 부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시작인 빅뱅 이전에는 무(無)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과학은 빅뱅이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과학수준으로는 아주 어려운 주제입니다.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년 입니다.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년 입니다. 그 시간의 길이를 생각하면 어질어질 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0.1%를 겨우 알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인들은 지구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도(道)의 기원은 빅뱅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덕경은 어마어마한 컨텐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우주(宇宙)의 제형상(諸形相)들은 이름을 부여 받으며 태어(有情·無情)납니다. 라이프니치가 말한 무수한 모나드(monad)가 새롭게 하나씩 만들어졌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모나드는 독립적인 개체로 생존해 나갑니다. 자아의 정체성은 아주 고유(固有)합니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따라서, 늘 탐심(貪心)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만물의 숨겨져 있는 오묘(奧妙)한 이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비워야 담을 수 있고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그러나 탐심(貪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사물의 드러난 껍데기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탐심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보는데 사물의 본질이 제대로 보일리가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형상들 전부는 허상(虛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此兩者(차양자)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 이 둘(妙와 徼)은 동일한 도(道)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 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같으나 그 나무의 가지들은 자유롭게 뻗어 나갑니다. 그 뿌리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모든 형상들을 다르게 봅니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유식학의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귀결됩니다.· 同謂之玄(동위지현)玄之又玄(현지우현) 이 동일한 도(道)에서 나옴을 현(玄: 거무스레해서 잘 알수 없다)이라고 말합니다. 거무스레해서 잘 보이질 않습니다. 새벽 동틀 무렵의 사물들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환하지 않아 사물이 보일 듯 말듯 합니다. 도(道)의 세계는 늘 애매하고 불분명 하고 알송달송 합니다. 사바(娑婆) 세계의 본질도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입니다. · 衆妙之門(중묘지문) 도(道)는 이 모든 오묘(奧妙)함이 나오는 문(門)입니다. 미스터리의 결정체가 도일 듯 합니다. 명확하게 보여지고 만져질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것 이라면, 그것은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란 거무스레 하다고 했습니다. 스스로가 찾아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공자(孔子)도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즉,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습니다. 도(道)의 깨우침은 목숨을 내줄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無, 아무것도 없다)란 도(道)의 가장 본원적 상태이며, 무위(無爲, 일부러 하는 것이 없다), 무지(無知, 아는 것이 없다), 무욕(無欲, 욕심이 없다), 무아(無我, 내가 없다)로 분화 발전되어 나갑니다.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것으로부터 배제된 자연상태 즉,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추구합니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표현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의 한계점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유가 사상과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道)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 而無不爲/제37장). 하늘은 도(道)를 법도로 삼으며, 도(道)는 자연을 따른다(天法道, 道法自然/제25장)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유위(有爲)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도(道)라는 메타포(metaphor)를 통해 던졌습니다. 도덕경은 모든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것으로부터 초월하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서’ 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龍)과 같은 사람이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