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불빛 속에 드러난 그녀 얼굴이다. 얼핏 보니 그녀 옆모습엔 고단한 삶이 짙게 드리워졌다. 젊은 날 복사꽃처럼 고왔던 외양은 간곳이 없다. 그녀는 내 앞에서 속이 타는 듯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이내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빨아 허공에 연기를 내뿜는다. 이때다. 유난히 굵은 그녀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그 손에 눈길이 머물자 갑자기 '저 손이 그녀 인생을 탐욕의 화신으로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에 왠지 그녀 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손등엔 불로 지진 듯한 흉터가 군데군데 있다. 비록 한탕주의에 물들었던 그녀다. 하지만 자제력은 그나마 남아 있었나보다. 아마도 손등 흉터는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자학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본다.
 
그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이를 알아챈 듯 묻지도 않았는데 특유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이 흉터 보기 싫지? 내가 이 바닥에서 손을 씻어보려고 발버둥 칠 때 마다 담뱃불로 원수 같은 내 손을 지졌었단다." 라는 말에서 나는 그녀가 자신이 행했던 일에 일말의 자책과 그것이 왜 그릇된 것인가를 적으나마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편 고통에 찬 그 각성의 표식을 대하자 그동안 그녀에 대하여 곱지 않았던 시각도 다소 반감되는 기분이었다.
  학창시절 친구인 여인을 오랜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찻집에서 마주앉아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듣노라니 불현듯 ‘여자 일생에 결혼과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의문이 갑자기 일었다. 현대 젊은 여성들이 결혼 상대자로 능력 있는 남성을 고르는 것도 '결혼도 평생 직업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란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 세태를 지켜보노라니 만연된 물신주의와 이기주의가 결혼에 대한 본질마저 희석시키고 있는 듯하여 괜스레 입맛이 씁쓸했다. 예전처럼 사랑해서, 혹은 상대가 없으면 못살 것 같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잖는가. 결혼을 앞둔 일부 여성들은 사랑 따윈 전혀 안중에 없는 듯하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결혼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상대를 고르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면 지나칠까? 그렇다면 결혼관도 이젠 시대 따라 달라졌다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리라. 하지만 지난 시절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여인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부모님이 극구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었다. 그녀의 남편은 당시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처녀 때부터 가발공장 여공으로 취업한 그녀는 결혼 후에도 계속 직장 생활을 하였다. 그녀 돈벌이로 신혼 초엔 넉넉지는 못했지만 오직 두 사람이 지닌 뜨거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남편이 친구 꾐에 빠져 도박에 손을 대었다. 처음엔 운이 좋았던지 그는 도박장에 나갈 때마다 돈다발을 아내에게 안겨주었다. 그 행복도 잠시, 그녀 남편은 도박장에서 전세금마저 다 날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는 수없이 친척집에 방 한 칸을 간신히 빌려 생활 즈음 남편이 그녀에게 도박을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단다. 남편의 제의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도박은 급기야 남편보다 한 수 위라 할 만큼 솜씨(?)가 발전한 그녀였다. 도박장에선 ‘박사’로 통하리만치 그것의 고수로서 그녀는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허나 세상에 공짜는 없잖은가. 힘 안들이고 번 돈은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도박으로 손쉽게 번 돈으로 그녀 남편은 경험도 없이 사업을 시작해 얼마 못가서 지닌 돈을 전부 탕진하고 말았다. 이에 남편이 화병으로 세상을 뜨자 홀로 된 그녀는 도박장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녀 슬하엔 자식도 없다. 어디 자식뿐이랴. 수중엔 몇 푼의 돈도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란다.
 
어느 지인이 그녀의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해 재혼할 것을 권유해 왔다고 한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늙수그레한 촌부란다. 다행히 집안 경제는 안정되어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 말에 비록 늘그막 재혼일지언정 서로 사랑은 존재해야 되지 않느냐는 나의 충고에 그녀는,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며 정색을 한다.
 
하긴 남녀 결혼에 있어 현실성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아서인지 그녀 반론에 수긍이 갔다. 아무리 사랑이 지고지순하다고 해도 눈물 젖은 빵 앞엔 뜨겁던 사랑도 싸늘히 식기 마련일 것이다. 이로 보아 예전과 달리 그녀의 애정관도 많이 달라졌다. 결혼도 사랑보다 물질이 충만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정립돼 있어서다. 이런 그녀를 보며 이즈막에도 사랑의 순수성을 가슴속에서 저버리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곤 사랑에 대한 혼선에 새삼 고뇌했다. ‘진실한 사랑이라면 가난뱅이면 어떠랴.’ 라는 평소 생각이 그것이다.
젊은 날엔 한번쯤 사랑의 열병에 걸려 보고 싶은 환상은 누구나 지니기 마련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랑만큼은 인류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듯하다. 사랑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하였어도 그 고통은 곧 잊히지 않던가. 사랑의 홍역을 호되게 치룬 후엔 결코 그것에 눈멀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난 철부지 여인인가 보다. 사랑의 무덤인 결혼을 경험했잖은가. 그럼에도 이 나이에 이르도록 요즘도 사랑의 신기루에 대한 착각을 일으키니 이를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