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예술학교(1946년 4월 설립된 남한 최초 본격적인 예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던 원로 작가 조희수 화백(1927~2023)이 23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98세. 빈소는 경주시민장례식장에 마련돼있으며 발인은 27일 오전 8시다. 유족으로는 자부 김문옥 씨와 3녀 조옥, 조금, 조록 씨가 있다. 필생토록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걸어온 조희수 화백이 생존해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문화예술의 자부심이었다. 남산자락의 배동 자택 겸 화실에서 검박하기 이를데없이 생활하고 있었던 조 화백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숱한 고난의 시기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꿋꿋이 활동한 작가로 한국화단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일생을 화업을 위해 투신한 조희수 화백을 두고 ‘경주 서양화단의 원로작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산증인’, ‘서양화 1세대 작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등의 숱한 수사가 따라다녔다. 조 화백은 한국을 대표하는 경주 출신 작가인 황술조, 손일봉, 김준식, 박봉수의 뒤를 잇는 작가로 영남의 화단에 무게를 더했었다. 경주예술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인수, 박기태, 이수창 등과 함께 굵직한 자취를 남긴 20세기 한국 화단의 중심에 있었던 작가였다. 조희수 화백은 파란만장한 질곡의 역사속에서 향토적인 사실주의를 지향한 원로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리얼리티의 진실함과 서민들의 애환을 따스한 심성으로 바라보는 예술적 시각을 가진 조 화백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일상 속의 친근한 풍경을 주로 담아냈다.
선생의 화업이 이룩한 진폭과 진동은 지역화단 뿐만 아니라 한국화단에 울림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후진들을 통해 그 맥놀이의 파장이 진하게 전해지고 있다. 경주의 문화부흥을 위해 화려한 꿈을 꾸었던 경주 1세대 근·현대 미술 작가의 맥이 오늘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는 조희수 화백이 건재했었다. 조희수 화백은 1956~1970년 국전출품 9회 입선(경복궁미술관), 1976년 1회 서울미술회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7회를 가졌으며 1984년 현대미술 초대 작가(국립현대미술관), 1985~87년 아세아 현대미술초대(일본 동경), 2017년 ‘계림, 신화의 숲’ 전(경주예술의전당)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미술단체 신기회와 목우회에서 활동했으며 1989년 제30회 경북문화상, 2003년 경주시 문화상 등을 수상, 경북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사)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미술협회 경북도지부장, (사)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초대지부장,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