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정들고 또한 떨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야말로 콩 한 쪽도 나누어 주는 사람에겐 정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것이라면 티끌 하나도 베푸는 데 인색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 곁에선 냉기가 돌아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어려서 어머니는 나그네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 길을 묻더라도 빈 입으로 보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냉수라도 먹여 보내곤 했다. 어디 이뿐인가. 그 때는 너나없이 궁색한 살림살이라서 그런지 해진 옷을 입고 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거지들도 많았다.
 
바가지를 들고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음식을 구걸하곤 하였다. 이런 거지가 동냥을 하러오면 어머닌 새카만 보리밥 속 중간에 박았던 할머니 몫인 귀한 흰쌀밥만을 골라 거지에게 퍼주곤 하였다. 쌀밥이 귀했던 그 시절이다. 우리 형제들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쌀밥이었다. 그것을 구걸하러 온 거지에게 선뜻 퍼주는 어머니를 어린 마음에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이 행동에 어느 날 의문을 품고 질문을 했다. “ 어머니, 할머니만 드리는 쌀밥을 왜? 아깝게 거지에게 몽땅 퍼주세요?” 그러자 어머닌 타인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줄 때는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요즘도 잊히지 않는다. 어머닌 그랬다. 하다못해 과일이 있으면 어머닌 가장 실한 것을 골라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잔챙이만 우리에게 주었다. 지난날 이런 어머니 모습을 요즘 어느 여인으로부터 발견 하곤 한다.
 
그녀는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타인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걸핏하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런가 하면 바닷가 근처에 자리한 시댁을 다녀오며 마른 생선 및 각종 해산물 등을 사들고 와 주위 사람에게 나눠 주기 일쑤다. 어디 이뿐이랴. 김장철만 다가오면 애써 담근 김장 김치를 한 통씩 이웃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모임이 있을 때도 무겁게 자신이 담근 김치를 식당까지 들고 와 회원들에게 맛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푸근한 정에 이끌려 항상 그녀 곁엔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내 것을 덥석 타인에게 베푼다는 게 사실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솔직히 단 돈 1원인들 내 돈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언젠가 내 것을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베푸는 어느 기업인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가슴이 뭉클했다.
  서른여덟 살에 빈 털털이가 되어 울산 역 부근에 철길을 베고 누웠던 그였다. 공사판 막노동을 전전하며 어렵게 삶을 꾸려온 그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나보다. 그래 죽음을 택하려 했던 것이다. 경북 포항이 고향인 그는 구룡포 앞바다에 ‘미역바위’라는 바위섬이 그의 집 소유였다. 이 덕분에 어려서는 유복하게 자랐단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제대 한 뒤 철선鐵船을 구입한 뒤 인생이 뒤틀렸다.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전 재산을 탕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삼륜차 짐칸에서 흔들리며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1만원이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찾은 곳이 일자리가 많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울산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나보다. 신문 배달, 방적공장 생산직, 공사판 노동자 등 온갖 궂은일을 다했으나 좀체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삶에 지쳐 죽음을 택하려고 철길을 베고 눕기도 했던 그다. 이런 그가 기차 기적 소리에 정신을 차려 인력 시장에 나가 공사판 잡부로 죽을힘을 다하여 일을 했다. 이렇게 억척스레 일을 한 돈으로 유리 가게를 열어 이 사업이 번창 했다. 훗날 이 가게는 연 매출 100억 원의 ‘한진 종합 건설’로 변신했다. 사업에 성공하자 그는 ‘경암 문화 장학 재단’을 세웠다. 그리곤 형편이 어려운 노인, 학비가 없는 학생 등에게 수 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그가 내세운 인생 목표는 “가진 것을 멋지게 털고 가는 게 자신이 꾸려온 앙코르 인생”이라고 밝혔다. 혼신을 다 바쳐 모은 재산을 자기 자신과 가족만 위해 쓰다가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애써 일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보다는 자손에게 남기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신문 기사 속 주인공은 달랐다. “ 나는 내 자식들이 도시락을 못 싸 소풍을 못 가게 만든 아버지였다. 그 때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내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라는 결의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행을 실천한 것이다.
그의 이웃 사랑 이야기는 그동안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필자를 부끄럽게 했다. 무엇보다 회사도 사업도 인간도 이웃과 공존하지 않으면 공멸共滅한다는 진리를 이 글에서 깨우쳤다. 오로지 ‘나만 잘 살면 된다’라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들과 나누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여서 더욱 깨닫는 바가 매우 컸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자선 사업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베푸는 사람은 수명도 길어진다고 했다. 이게 아니어도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은 인간만이 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덕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