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중국 상해시의 홍구세기대주점(虹口世紀大酒店)이란 호텔에서 `Asia Piaget 교육 세미나`가 개최 되었다. 일본, 말레시아, 대만, 홍콩 등 여러 나라 유아교육과 교수 및 유치원장들이 참가하여 주제 발표를 하였다.  여(余)에게 맡겨진 `한국의 피아제 교육`이란 주제 발표를 마치고, 이튿날 우리 일행은 남경시의 문화 유적인 공부자묘(孔夫子廟), 남경대학살기념관, 주원장릉, 손문릉(孫文陵) 등을 관광하였다.   강소성에 위치한 남경시의 면적은 우리나라 서울의 두 배 정도이고 인구는 약 700만 명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평원이 70%, 산이 30% 정도로 구성된 곳이며, 여름에는 평상온도가 섭씨 39도에서 40도이며, 옛 명나라의 수도였고, 손문과 장개석이 정권을 장악하고 통치한 도시로서 북쪽에는 양자강이 있고 그 외 삼면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덥다는 것이다.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로 진입하니 하늘에 연운이 희미하고 성이 먼저 보였다. 이 성은 1368년에 주원장이 30만 명을 동원하여 축성한 거대한 성이었다고 한다. 성을 쌓을 때 사용한 벽돌에 제작자의 성명과 날짜를 함께 기록하도록 하여 책임을 지게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벽돌이 깨지면 제작자의 가족을 멸족 시켰기 때문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절대자의 권력이 벽돌에까지 미친 것을 생각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자묘(孔夫子廟)가 있는 대성전에 오니 정전 앞마당에 공부자의 전신 동상이 바르게 서 있고, 그 앞에는 관광객이 향을 사르느라 온통 향 냄새가 진하게 퍼지고 있었다. 대성전 바로 앞 도로변에 줄서 있는 홍등이 아름답고, 길 건너 강에는 유람선이 관광객을 태워 선유를 하는 명소가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분향을 마치고 남경대학살기념관에 오니 입구에 높게 만들어진 성벽이 내부의 세계를 차단하고, 외벽에는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전쟁의 피해를 입은 참혹한 동상들이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중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영아의 조각상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엎고 하늘을 쳐다보며 힘들게 걸어가는 조각상 또한 남경대학살의 참혹상을 재현하는 듯 했다.  주원장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물리치고 41세에 황제로 등극하여 남경에 도읍을 정해 71세 종생 할 때까지 30년 동안 통치를 하였고, 그의 후손 3대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하였으나, 장손에게 승계하여 둘째, 셋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풍수를 전국에 파견하여 명당을 찾게 했는데 그 중 이곳 자금성이 선택되어 자기의 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둘레가 24km가 되는 방대한 묘역을 설정하고 그 안에 손문의 무덤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능묘는 전부 철거했다고 한다. 자기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을 12개나 만들어서 들어가는 코스를 모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곳은 1998년에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손문의 능인 명효릉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가로수를 밑 둥에서부터 3m되는 자리에 가지를 잘라 크게 세 가지로 가꾸어 놓았다. 이것은 손문의 `민주, 민생, 민권`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삼민주의를 뜻한다는 것이다. 출입문에는 `박애`라는 글씨가 게판 되어 있어서 손문사상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그 다음의 문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것이다`라는 뜻이다. 대단히 의미 깊은 말이다.   손문의 비석에는 전면에 `中國國民黨葬 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 十八年 六月一日`이라는 금박글씨가 기록되어 있었으나 뒷면에는 통상적으로 주인공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글자가 명각(銘刻)되어 있지 않았다. 손문의 업적이 하도 많아서 그것을 좁은 비면에 요약하여 쓸 수가 없기 때문에 무자비(無字碑)로 세웠다는 것이다. 그 다음 문에는 `천지정기(天地正氣)`라는 큰 현판이 있고 그 아래에 `민족, 민생, 민권`이라는 글씨가 크게 황금색으로 게시되어 있었다.   이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둥근 석조지붕 아래에 손문의 양장 조각상이 대리석 석곽위에 누워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조각은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가 조각해서 보내온 것이라 한다. 인간의 영욕이 남긴 남경의 현장을 보고 느낀 감회가 심금을 자극하기에 어설픈 시문에 담아 보았다.옛 도읍 남경에 연운이 깊은데( 古都南京煙雲深), 높은 빌딩 큰 집 금같이 빼어나게 아름답네(高樓峻屋似美金). 중산릉원에 창송(蒼松)이 푸른데(中山陵苑蒼松靑), 손문(孫文)석상은 말없이 엄숙하네(孫文石像無說嚴).공자사당에 향 피어 배례하고 보니(夫子祠堂獻香拜), 저명한 제자들 헛된 한단의 벼개 되었네(門下諸賢邯鄲枕). 붉은 등 긴 행렬 가도 채색하니(紅燈長列彩街道), 항상 푸른 가로수 세월 느끼지 못하네(路樹常綠歲不感).민주·민생·민권, 박애를 위하는 천지정기가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라는 아팠던 남경의 외침을 다시금 새겨 보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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