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어떤 인물인가. 전국의 자치 단체장들이 다산목민관 대상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낙영 경주시장이 공직자로서 최고상인 다산목민관 본상을 차지해 화제가 되고 있다. 행정자치부가 정약용 선생의 목민 정신을 행정 현장에서 실천하는 목민관을 발굴해 시상하는 상이기에 권위가 있다.   주 시장은 큰상의 영광을 25만 경주시민과 1800여명의 공직자에게 공을 돌렸으나 시장이 오직 좌고우면하지 않고 시민만 바라보고 목민관 다산의 길을 걸어온 것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공직사회의 청렴의 상징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 그는 조선시대 문신이자 유학자이면서 뛰어난 기술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기예론(技藝論)’이란 단편에서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삼강오륜과 같은 윤리에서 찾지 않고 기술에 주목했다. 인간 생활의 혜택이 모두 성인의 덕택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시대가 지날수록 기술이 발전한다는 진보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상고사상(常古思想)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기예론은 기술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고찰한 우리나라 최초의 집필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발명가 겸 기술정책가·기술 사상가로서 기술을 사랑한 인물로서 사실상 그의 세계에는 문과와 이과가 모두 녹아 있었다. 정약용은 요즘에 많이 거론되는 통섭이나 융합의 대가였던 셈이다. 아마도 그는 ‘문과라서’ 혹은 ‘이과라서’라는 변명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의 사상이 심오한 이유는 그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는 법이다.   정약용은 1800년에 정조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유배에 처했다.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이용감(利用監)을 신설해 기술을 도입·보급하고 기술자를 양성하자고 제안했다. 목민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다산이란 호는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이 차(茶) 재배지로 유명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공직자 덕목은 무엇보다 청렴이다. 신뢰받는 공직 문화조성은 청렴에서 시작된다. 청렴 하위 경주시를 1위로 끌어올린 주 시장은 시민을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지속 가능한 도시 발전과 미래를 위한 알찬 준비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다산의 길을 걷고 있는 주낙영 경주시장은 어려운 시기에 따뜻한 소식을 전해주고 있어 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주 시장은 수상소감을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고 더욱 노력하겠다”고 겸손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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