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울면서 태어난다. 그 울음소리는 아기가 말을 배울 때까지는 아기의 언어가 된다. 그 울음소리를 통하여 엄마는 아기의 요구를 파악한다. 배가 고픈지, 졸리운지, 어디가 아픈지를 구분하게 된다. 이 아기의 언어는 경험이 많은 엄마일수록 잘 알아듣는다. 첫 아이를 기를 때 엄마들은 이유 없이 악을 쓰고 우는 아기 때문에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도 그랬었다. 한 밤중에 아기가 깨서 울기 시작하는데 젖도 먹었고, 기저귀도 갈았고 그 때까지 잘 잤으니 졸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계속 까르륵 숨이 넘어갈 듯이 울었다. 당황해서 옷에 뭐가 들어가서 찌르고 있나하고 옷을 다 벗겨 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아기를 들쳐 업고 병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땐 남편이 지방에 근무하고 있어서 혼자이다 보니 더 두려웠다.   한 밤중이고 그때는 통금까지 있었던 때라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지만 무조건 뛰쳐나왔다. 그 시간에 병원이 열려 있을 리도 만무했지만, 큰 길에 병원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무조건 나선 것이다. 큰 길까지 내달아서 병원 앞까지 왔지만 당연히 병원은 불이 꺼지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기가 울음을 그친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집으로 가면서 깨달은 것은 아기가 너무 더웠구나.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차서 울음을 그쳤던 것이다. 지나놓고 보니 경험 없는 엄마의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인간의 눈물은 다양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슬픔, 아픔, 감동 등 인간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슬퍼서 울지만, 실컷 울고 나면 슬펐던 원인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울기 전보다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눈물의 카타르시스적인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을 정화시키는 뜻의 그리스어로 정화` 또는 `정신적 압박 해소`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특히 드라마를 관람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고 또 해소시킴으로써 관객의 정신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그 부담을 해소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이때 눈물을 통해 코르티솔이 체외로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눈물은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정신적으로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눈물의 카타르시스는 인간의 정신적인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눈물의 심리적인 의미 외에도 눈물은 생리학적인 치유력도 가지고 있다. 눈물은 눈을 보호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즉, 먼지나 외부의 불순물을 차단하고 눈에서 나오는 독소를 제거하고 눈이 건조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눈의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유교적인 사상으로 인하여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가르쳐 왔다. 남자는 유약해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무서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이 안 보는데서 몰래, 조용히 울어야 했다. 그래야만 남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큰 소리로 펑펑 울 수는 없고, 카타르시스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간혹 남자아이가 울다가 들키면, 계집애처럼 왜 우느냐고 더 혼을 냈기 때문에 `꺼억, 꺼억` 눈물을 참아야 했다. 그래서 `사나이는 가슴으로 운다`는 유행가 가사도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딸들에게도 보는 앞에서 울지 못하게 했다. 만약 들키는 날에는 무섭게 야단을 쳤다. 지금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정 울고 싶은 일이 있으면 꾹 참았다가 학교에 가는 버스 안에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슬쩍 슬쩍 곁눈질하며 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눈물이 자꾸 흘렀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지금과 달리 무서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얼른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반대의 상황인 것 같다. 아이들이 우선이고 아버지의 권위는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남편의 권위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맞벌이 부부이다 보니 가장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예전 같은 무조건 남성 우위의 사회도 문제지만 지금처럼 가정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눈물은 또한 인간이 감동을 느낄 때도 흘리게 된다. 올림픽 경기나 국제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겼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이것은 뇌의 화학물질인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농도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우리는 기쁨, 만족감, 행복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물은 사랑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강하게 일어날 때 자연스럽게 눈물이 난다. 사랑의 기쁨으로 울고, 사랑의 아픔과 이별 때문에도 운다. 이처럼 인간의 희로애락에 가장 깊게 관여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눈물은 용서와도 관계가 있다.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과정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용서는 상처를 입은 자와 상처를 준 자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과거의 상처를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를 말한다. 용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서,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사회적인 능력으로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고, 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의 눈물은 윤활유의 역할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고 빠르게 회복시켜 준다.  그 밖에 눈물은 인간의 정신적, 생리적, 심리적 외에도 사회적인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물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즉 우리의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친밀함과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와 같이 눈물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고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인간은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어야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악어의 눈물도 있다. 거짓눈물 즉 위선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악어가 제가 죽인 먹이를 먹으면서 불쌍한 듯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입안의 수분을 보충시켜주는 과정에서 눈물이 나오는 생리현상이지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로 위선자나 범죄자 또는 정직하지 못한 정치인들이 위기의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흘리는 거짓 참회의 눈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세상은 전보다 점점 편리하고 풍요로워 가지만 악어의 눈물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눈물은 인간의 삶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며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과 더불어 아름다운 눈물을 가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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