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티끌 한 점 없다면 그 많던 청소부들 생계가 걱정 된다. 어디서 무엇으로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취업이 힘든 시기엔 더더욱 그렇잖은가. 이로보아 때론 상황에 따라 경미한 사회악도 다소 필요함마저 느낀다. 쓰레기를 매개체로 생업을 잇는 청소부들에겐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어떤 면에선 자신들 밥줄과도 연관성 있다면 지나칠까. 그러므로 하찮은 쓰레기일망정 그들에겐 필요불가결의 물질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양면성을 지닌 양상들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존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린 사안에 따라 그 양날의 칼을 선뜻 제대로 수용치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인간 삶의 원동력이라 할 성만 하여도 그렇잖은가. 인간의 가장 강렬한 원초적 본능인 성이다. 그것이 색色으로 둔갑하여 인간을 미혹 시킨다면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음풍淫風이 뒤따라 인간을 타락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생산적 행동으로 자리할 성이 인간을 색의 노예, 포로로 삼는다면 그것은 파멸의 지름길로 접어드는 거나 다름없다.   요즘 그 음풍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온갖 사회악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 때는 원조 교제가 성행 하더니 이젠 걸핏하면 성추행, 성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는 요즘이다. 어디 이뿐인가. 언젠가 어느 밀실에선 여성들조차 젊은 청년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환락의 밤을 즐기던 일이 있었다. 일명 호스트바 출입이 그것이다. 인간의 성은 이제 더 이상 감미로운 꽃만은 아닌가 보다. 남녀 간에 진정한 사랑은 실종되고 육체적 쾌락만 좇고 있는 세태에 이르렀다면 지나칠까. 1991년 7월 우여곡절 끝에 우리 곁을 찾아온 『즐거운 사라』, 그 소설 작가인 고故 마광수 교수는 그 때 이미 오늘날 퇴폐적인 성문화를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렬한 본능인 성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거침없이 소설을 통하여 내 뱉았다.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고루했던 우리네 가치관을 정확히 파헤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작품을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였다. 그는 작품 『즐거운 사라』작가 인사말에서 밝혔듯이 이제껏 우리는 구태의연한 조선 시대적 윤리와 엉거주춤 양다리 걸치기 식 눈치 보기 풍조 때문에 개인적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이 제한 받아왔다고 언술했다. 일인칭 기법을 사용하여 현실과 공상 사이를 넘나들며 쓴 소설 내용이 어쩜 요즘 세태와 그대로 맞아 떨어졌을까. 특히 여주인공 사라와 대학교수 한지섭과 정사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긴 손톱을 지닌 여자에게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페티시스트적인 한지섭이 지닌 성적 취향이 저자가 평소에 주창한, “ 사랑은 상대방 외모에 관능적 경탄의 감정에서 시작 된다.”라는 말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동안 성은 터부시 해온 게 사실 아니던가.   그러다보니 음습한 곳에서 독버섯처럼 그 욕망이 번져나갔다. 그에 따른 악취는 얼마나 진동하는가. 은밀한 곳에서 숨기려 애쓸수록 그 냄새는 고약하지 않던가. 그는 외쳤다. 성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자고 말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문제만큼은 ‘쓰레기통에 뚜껑만 닫아놓고 있는 양상’이어서 은폐할수록 속으로 썩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쓰레기통에선 시대에 맞지 않는 성의식이 잔뜩 들어 있어서 그것들의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녹아나 구린내를 풍기며 구더기만 득실거리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실 오늘날 성인군자인체 하는 우리는 지금 그것의 뚜껑만 덮느라 급급해 온 것은 아닐는지 손이 절로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마광수의 이 말이 요즘은 무색해지고 있는 현상이랄까. 전과 달리 성이 개방화 된 탓인지 모르겠다. 대중을 상대하는 언론에서조차 성관계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말하기도 하잖은가. 뿐 만 아니라 다 큰 딸들이 이성과 하룻밤을 지내고 오는 일에도 예전처럼 부모들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잖은가. 오히려 원치 않는 임신을 할 수 있으니 콘돔을 사용하라는 말까지 부모가 성장한 딸들에게 일러주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 하리. 지난날 그토록 변태적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마광수 교수가 펼쳐온 성적 담론이 현실로 앞당겨졌다고나 할까.   생전에 음란과 선정성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사회적 지탄을 면치 못했던 그였다. 오늘날 그는 ‘탐미적 본능’, ‘관능적 상상주의’ 등으로 작가 정신이 평가 받고 있다. 필자의 카타리스 효용에 의한 기대치 때문 일까.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친필 사인까지 적어서 필자에게 보내준, ‘19세 구독 불가’라는 그의 아홉 번째 소설, 『유혹』에 자신도 모르게 유혹됨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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