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내에서 동경주로 향하는 길이 수년 전부터 편해졌다. 토함산터널이 뚫리면서 굽은 고갯길을 버리고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이 열리기 전에는 추령재를 넘어야 했다. 추령재를 넘어 동경주로 가다보면 도로 오른쪽에 줄기차게 흐르는 강이 하나 있다. 그 강이 바로 대종천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해왔을 때 황룡사에 있던 대종을 몽골군이 가져가려고 시도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강에 빠뜨리고 말았는데 이 강이 바로 대종천이다. 대종천에는 그 후로 풍랑이 심하게 일면 종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굽이굽이 흐르던 대종천의 폭이 갑자기 넓어질 무렵 동해바다가 열린다. 그리고 그 입구에 지금은 절터와 2기의 탑만 남은 감은사터가 나타난다. 문무대왕면 용당리다. 감은사는 682년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했다. 문무왕은 생전에 동해바다 인근에 절을 세워 부처님의 공덕으로 왜구를 격퇴시키겠다고 했지만 완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은 죽기 전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고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한 뒤 절 이름을 감은사라고 지었다. 감은사는 동서로 우뚝 서 있는 3층석탑이 가장 유명하다.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는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감은사지 3층석탑에 대해 입이 닳도록 극찬했다. 이 탑이 크게 알려진 것은 유홍준 교수의 덕이 아닐까 할 정도로 그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탑에 대한 그의 감상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유 교수는 그의 책에서 3층석탑에 대해 “만약에 감은사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라도 썼다. 더 이상의 첨언이 필요없는 감탄이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라 탑파양식의 대변화를 가져온 존재다. 그 전까지 신라의 불탑은 5층탑이 주를 이뤘다. 대표적인 5층석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그 후 의성 탑리의 5층석탑, 경주 나원리의 5층석탑, 경주 장항리의 5층석탑 등이 생겼다. 그러다가 감은사에 이르러 3층석탑이 생겨난 것이다.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이유를 들으면 감은사지 3층석탑이 얼마나 중요한 탑인지 알 수 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1962년 국보 112호로 지정됐다. 그 전까지의 5층석탑은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긴 했지만 힘이 없어 보이고 안정감이 떨어졌다. 감은사를 만들 당시 신문왕은 통일된 국가의 힘찬 의지를 반영하고 싶었고 장중하고 힘차 보이는 석탑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상승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구현한 최초의 석탑이 됐다. 감은사지 3층석탑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선사탑은 원효대사가 기거했던 암곡동 고선사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덕동호에 수몰되면서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 남쪽 마당에 세워져 있다. 고선사탑은 감은사탑보다 조금은 투박하게 보이지만 통일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바꾼 대표적인 석탑으로 박물관을 찾는 이라면 눈여겨 볼만하다. 아무튼 감은사지 3층석탑 이후 신라의 탑은 3층탑으로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도 바로 이 영향을 받은 3층석탑이다. 감은사지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곳이 있다. 바로 금당터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남긴 기록이다. “신문왕은…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사중기(寺中記)에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감은사의 금당은 2층으로 기단을 정연하게 쌓고 기단의 각 면마다 중앙에는 돌계단을 놓았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석재를 동서 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마루를 얹어 놓은 것같이 돼 있다. 구들장을 들뜨게 만들어 금당의 바닥으로부터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형성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된다. 그런데 감은사지의 위치가 동해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고 과연 금당 바닥에 바닷물이 흐를 수 있었을까 의심되지만 당시에는 감은사 바로 앞까지 바다였다고 하니 충분히 그 구조가 이해된다. 감은사지는 월성원전 홍보관에서 북쪽으로 약 7.2㎞ 떨어진 곳에 있다. 홍보관에서 감포방향으로 향하다가 봉길터널을 지나고 곧바로 바다를 만나면 왼쪽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삼거리가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감은사지가 바라보인다.   ※ 이 콘텐츠는 (주)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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