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하는 동경주 구석구석 오늘은 네 번째로 문무대왕면 감은사지를 찾아갑니다. 경주시내에서 동경주로 향하는 길을 가다보면 도로 오른쪽에 줄기차게 흐르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강이 바로 대종천입니다. 고려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해왔을 때 황룡사에 있던 대종을 몽골군이 가져가려고 시도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강에 빠뜨리고 말았는데 이 강이 바로 대종천입니다. 대종천에는 그 후로 풍랑이 심하게 일면 종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굽이굽이 흐르던 대종천의 폭이 갑자기 넓어질 무렵 동해바다가 열리고 그 입구에 지금은 절터와 두 개의 탑만 남은 감은사터가 나타납니다. 감은사는 682년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감은사는 동서로 우뚝 서 있는 3층석탑이 가장 유명합니다.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는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감은사지 3층석탑에 대해 입이 닳도록 극찬했습니다.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라 탑파양식의 대변화를 가져온 존재입니다. 그 전까지 신라의 불탑은 5층탑이 주를 이뤘습니다. 대표적인 5층석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입니다. 그러다가 감은사에 이르러 3층석탑이 생겨난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이유를 들으면 감은사지 3층석탑이 얼마나 중요한 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1962년 국보 112호로 지정됐습니다.그 전까지의 5층석탑은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긴 했지만 힘이 없어 보이고 안정감이 떨어졌습니다. 감은사를 만들 당시 신문왕은 통일된 국가의 힘찬 의지를 반영하고 싶었고 장중하고 힘차 보이는 석탑을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상승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구현한 최초의 석탑이 됐습니다. 감은사지 3층석탑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선사탑은 원효대사가 기거했던 암곡동 고선사에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덕동호에 수몰되면서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 남쪽 마당에 세워져 있습니다. 감은사지 3층석탑 이후 신라의 탑은 3층탑으로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도 바로 이 영향을 받은 3층석탑입니다.감은사지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금당터입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남긴 기록에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은사의 금당은 구들장을 들뜨게 만들어 바닥으로부터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형성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됩니다.그런데 감은사지의 위치가 동해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고 과연 금당 바닥에 바닷물이 흐를 수 있었을까 의심되지만 당시에는 감은사 바로 앞까지 바다였다고 하니 충분히 그 구조가 이해됩니다.감은사지는 월성원전 홍보관에서 북쪽으로 약 7.2㎞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홍보관에서 감포방향으로 향하다가 봉길터널을 지나고 곧바로 바다를 만나면 왼쪽으로 꺾어집니다. 그리고 삼거리가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감은사지가 바라보입니다.※ 이 콘텐츠는 (주)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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