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년 전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관련한 숨가빴던 경주 근현대사 이야기 그 세 번째로는, 교촌을 지켜주던 숲, 비보림(裨補林, 부족한 곳을 채우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경주는 숲의 도시였다. 낮에 들어가도 햇빛이 안 보일 정도로 우거졌다는 그 숲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교촌에도 마을을 지켜주는 숲이 있다.   일제강점기 교촌 사진에는 마을 뒤로 울창한 숲이 보인다. 일제 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임수(1938)’에서는 ‘교리택목(校里宅木)’ 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교촌의 숲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조선의 임수’에서 경주는 1938년 당시 12곳으로 나정, 계림, 오릉, 낭산, 봉황대, 청경림, 왕가수, 비보수, 교리택목, 오리수, 고양수, 양동지번으로 나눠 소개했다.   이 책에서 ‘교리택목’은 ‘경북 경주군 경주읍 교리에 소재한다. 경주읍 중심도로에서 남동으로 2km에 위치하고 동쪽에는 향교와 계림이 있고 남동으로는 월성의 구릉이 펼쳐지며 남쪽은 교리의 취락과 남천의 청류에 임하고 있다. 즉 교리의 취락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가옥의 북쪽과 서쪽의 양측을 연결한 200미터의 긴 띠 형태’라고 쓰고 있다.   또 ‘임황(숲의 현황)은 소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 100그루 내외가 섞여 줄지어 자라고 있다. 같은 경급의 거목으로 최대 흉고직경이 100cm에 달하며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최씨 세거의 택지 내에 위치하고 후손의 부귀영달과 더불어 주택의 겨울철 방풍과 여름의 녹음을 확보하며 일면 풍치의 개념도 더해져 계속 금양(벌목을 금지하고 보호해 기름)되어 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동 비보림은 최부자댁 후원(後園)으로도 불렀는데 지금은 옛 모습을 잃고 고목이 열 그루쯤 남아 이 마을의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 고목들이야말로 교동 이력의 산증이다. 전체 5천여 평의 교동 비보림은 1800년경 숲을 만들었다고 전하니, 2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숲인 셈이다.   교리 비보림 조성에 관한 흥미로운 스토리가 전한다.   용암 최기영(1768~ 1834)은 경주 최부잣집 12세 중 8세지만 최부자 가문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었다. 내남 이조에서 경주 교동으로 이사를 결행해 최부잣집의 교촌 시대를 열었다.    경주 최부자댁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부상하도록 길을 연 이가 바로 용암 최기영이다.   1779년 최부자댁이 경주 내남면에서 교촌으로 이사 온 뒤 큰 집을 지으려고 하자, 바로 옆 경주향교 유림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부잣집이 이사를 오면 이 집을 찾아오는 과객들이 많아 면학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고 만석꾼 부자가 크고 웅장한 집을 지어 향교의 위상을 해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최기영은 살 집의 용마루를 이웃한 향교보다 다섯 자 낮추기로 했다. 기둥도 한 자 약(30cm) 이상 잘라냈다. 향교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집 지을 땅과 인근의 땅을 모두 깎아 낮췄다. 그게 3만 평 정도니 대역사를 일으킨 셈이다.    깎아낸 땅은 집 뒤에 쌓아 높이고 그 땅의 흙을 마을 뒤로 옮겨 언덕을 만들고 느티나무를 심어 비보림을 만들었다. 자연스레 향교와 경계가 되는 효과도 보았다. 이렇게 해서 아담하고 소박한 만석꾼 최부잣집이 지어졌다.   뒷산이 없는 교촌마을은 풍수적으로 불완전한 곳이었다. 배산임수에서 이 비보림이 배산 역할을 한 것이다. 최부잣집이 들어선 교동은 앞에 남천과 도당산 남산이 들어서 안대가 매우 우수한 지형이었으나 집 뒤에 산이 없어 명당의 조건인 배산임수를 이루지 못했다.    인공적으로라도 집 뒤의 산을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 숲을 배산으로 삼아 불완전한 지형을 보완했다. 향교의 반발을 잠재우고 그 흙으로 집 지을 자리를 천하의 명당으로 만들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최부잣집 비보림은 교촌을 지키는 숲이 되었다. 이 비보림은 뒷산에서 사당을 통해 최부잣집 사랑채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수 백년 비보림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대포 생산을 위해 일본이 계림의 고목을 징발하겠다고 하자 최부자댁은 이를 막으려고 비보림의 나무들을 대신 내어 주었다. 이때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갔고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나무들만 남았다.   1958년에는 한국전쟁 중에 불탄 진주 촉석루 복원을 위해 남아있던 나무들까지 벌채될 뻔한 일도 있었다.   비보림의 나무들이 베어진 자리는 경주에 있는 두 학교의 개교와도 관계가 있다.    1940년 황남초등학교가 비보림 빈터에 가교사를 짓고 임시 개교했고 1952년에는 선덕여자중학교의 전신 (구)계림중학교가 향교에서 개교했을 때 이곳을 운동장으로 사용했다. 이때마다 비보림 고목들이 조금씩 더 잘려 나갔다.   이제 교리마을을 지키던 숲의 나무들이 몇 그루 남지 않았다. 최근 비보림의 현실을 보다 못한 최부잣집이 나무를 심기 위해 임대료를 내고 관리할테니 빌려달라고 하자 이곳을 소유한 영남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최부자 고택과 비보림, 친척들 집까지 소유한 영남대는 1980년대 박근혜 이사 시절 최부잣집이 기부한 많은 부동산을 팔아 치웠다.    2017년에는 과거 최부자댁 땅에 경주시가 월정교 주차장을 조성함에 따라 영남대는 막대한 보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남대는 지금까지 훼손된 비보림에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았다.   지금은 5천 평 숲 권역에 대해 연간 2백만원 정도에 민간에 임대료를 받고는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교동 비보림을 찾았다. 몇 그루 남지 않은 고목들 사이로 사유재산인 유실수와 감나무 농원이 얼기설기 관리 상태가 엉망인 채로 난잡하게 주거시설과 함께 혼재돼 있었다. 겨우 몇 그루 꿋꿋하게 버티어 온 숲 흔적만이 고색을 유지할 뿐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보니 내물왕릉이 지척이다. 향교와 연접해있고 계림의 경계 철책선과도 연이어 있었다.   ‘경주 교동과 최부자’의 저자인 최혁 선생은 “비보림 안에 나무를 다 베어내고 없는데도 지금도 고라니와 삵쾡이가 찾아온다. 교리 비보림은 월성 건너편 남쪽, 오릉과도 연결되는 숲이었다”면서 “지금이라도 영남대가 최부잣집에 임대만 한다면 비보림에 준하는 후계목을 조림해 교동을 찾는 수많은 이들이 이 숲에서 휴식하면서 힐링하는 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주 교동의 앞모습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조화로운 모습으로 단장돼 있다. 반면, 최부잣집의 교동 정착 스토리가 얽혀 있는 뒷모습인 비보림은 황폐하게 망가져 방치돼 있는 수준이다.    영남대의 적극적 협조와 경주시의 관심을 통해 복원과 정비를 서둘러 옛날 최부자가 조성했던 비보림이 속히 복원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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