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달리 요즘 매사에 나무늘보다. 고백하건대 이렇듯 부쩍 몸과 마음이 굼뜨게 된 데는 나름의 철학을 얻고 부터다. 젊은 날 어떤 일을 행하기전 항상 마음부터 앞섰다.  사실 안간힘 쓴다고 안 될 일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노력은 하되, 무슨 일이든 될 일은 애쓰지 않아도 절로 성사 될 때가 있다. 이런 진리에 어두웠던 당시로선 노심초사하면 만사 해결 될 줄 알았으니…. 얼마나 우매했던가.  이제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나이에 이르러서인가. 젊은 시절엔 솔직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고 하듯, 타인의 성공을 대하면 시기심 및 질투도 없었던 게 아니다.  요즘엔 아무리 주위 사람이 억만금과 빛나는 성취를 손에 쥐었다 하더라도 '그런가보다'라고 무심해진다. 이는 옹색했던 마음자락이 넓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만사에 그토록 태산 같던 욕심이 희석 되어서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애태웠던 일들이 실은 헛발질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얼마나 애착을 보였던가. 실은 상호 보족 작용(補足 作用)에 의하여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혼자만의 생각과 힘엔 한계가 있단 뜻이다. 어떤 일엔 운도 따라야 하고 기회포착도 적절해야 할 것이다. 그래 이즈막엔 무슨 일이든 애면글면 하지 않는다.  집 앞 호숫가를 산책하노라면 연령고하 막론하고 조깅을 하는 동네 주민들을 자주 대한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주먹으로 훔치며 뛰는 모습은 보기에도 절로 건강미가 넘친다. 2km도 채 안 되는 호숫가 둘레 길을 몇 바퀴 씩 뛰는 사람들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대회가 떠올랐다.  이 대회는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근대 대회로 알고 있다. 84·88년 이 대회에서 제패한 칼 루이스가 대회 2연패를 기록한 것으로 유일하다. 그만큼 이 대회는 2연패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88 서울 올림픽에선 벤 존슨이 약물 복용으로 박탈당한 금메달을 칼 루이스가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육상에서 미국의 젊은 신인 저스틴 개틀린은 예상을 뒤엎고 총알처럼 9.85초의 기록을 갱신,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때 텔레비전에서 새벽까지 이 경기를 시청하던 필자는 저스틴 개틀린의 경기 하는 모습을 보며 '인생사도 단 몇 초 만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인간 속도의 최고점을 시험하는 이 경기가 왠지 인상 깊었다. 이 때 주자들은 45 보步 쯤을 내내 발끝으로만 내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기 처음엔 대 여섯 걸음을 뛰면서 숨을 두 차례 정도 뱉을 뿐 한 숨도 호흡하지 않으면서 종착점까지 질주를 한다.  올림픽 대회에서 100m 달리기 및 마라톤, 무제한급 역도를 3대 경기로 손꼽는 이유는 ' 달 리고 견디며 들어올리는' 인간의 원초적 능력 한계를 재기 위함일 것이다.  특히 마라톤은 극한 고행에 가까운 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죽하면 '달리기의 단거리는 소질이요, 마라톤은 노력'이란 말까지 회자될까. 어찌 보면 마치 이 100m 달리기는 우리네 인생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다. 이 때문에 경기 내용에 오롯이 함몰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삶이 앞만 보고 달린 마라톤과 흡사하다면 지나칠까. 오로지 '잘 살아야겠다.'라는 이 일념으로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목표물을 향하여 내달렸다.  이젠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다. 젊은 날 삶은 여러모로 여유롭지 못했다. 올림픽 100m 달리기 주자들이 단 10초를 뛰고 나면 2시간은 휴식을 취해야 체력이 돌아올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힘겹게 수 십 년을 열정과 노력을 병행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머잖아 밝아올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며 여유로운 삶을 위하여 느긋하게 숨고르기를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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