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읍 전동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한때 150여 가구에 800~900여명의 인구가 살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떠나고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만 살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옹기점이 있었다고 해서 전골이라고 불러오다가 나중에 전동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우마을, 서상, 큰마을, 동쪽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는 전동리는 경주시에서 매우 이색적인 마을로 지정돼 있다. 바로 ‘유교문화집성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전동리의 자연마을 가운데 큰마을은 전동리의 본마을로 전동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피난해 정착한 김해허씨 입향조 허동(許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해허씨는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약 150가구에 이를 정도로 전동리는 김해허씨 집성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은 약 5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당시 인구로 따지면 최소한 500명이 허씨였던 셈이다.허씨 가문이 세운 재실은 4곳이며 서당 1곳이 있다. 삼우정, 삼락당, 삼인재, 경묵재 등은 허씨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며 노천재는 서당이다. 이밖에도 포은 정몽주의 후손들인 영일 정씨들이 세운 영오정도 전동리의 유교문화에 한몫을 한다. 삼우정은 이 마을 입향조 허동의 후손 삼형제 가운데 맏형인 허용이 세운 재실이다. 허용은 맏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부모님을 극진하게 봉양하다가 부모님이 병에 들자 부모가 배설한 변을 직접 맛을 보며 증상을 살폈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전한다. 또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산수와 벗하기를 즐겼고 악기를 다룬 책들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삼락당은 삼형제 중 둘째인 허숙이 세운 재실이다. 평소 과거에 임하기 위해 열심히 학문을 연마했지만 부모님이 세상을 따나자 “과거는 어버이를 행복하게 해드리기 위해 준비했지만 지금은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과거의 목적이 없어졌다”며 과거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우애를 더욱 소중하게 여겼고 형제가 모두 살아있는 즐거움, 형제가 오랫동안 천수를 누리는 즐거움, 자손이 번창한 즐거움 등 세가지 즐거움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서 ‘삼락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삼인재는 막내인 허욱이 지은 재실이다. 삼인재는 세 가지 욕망을 참는다는 뜻을 지녔다. 가난한 삶, 물욕, 분노가 바로 허욱이 참은 세 가지다. 삼우정과 삼락당에 비해 매우 좁고 나지막한 정각인 삼인재는 허욱이 살아생전 가졌던 검박한 심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재실이다. 지붕의 기와가 퇴색해 검정색이 날아가버려 희끗희끗하다. 마치 노년의 정갈하고 물욕이 없는 허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전동리 마을로 접어드는 입구의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경묵재는 허수가 지은 재실이다. 허수는 과거시험에 뜻을 두고 열심히 학문을 닦았으나 곧 포기하고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의 호는 묵재라고 하고 묵재의 서재라는 뜻으로 경묵재라고 불렸다. 마을 한가운에 있는 노천재는 김해 허씨 문중의 서당이다. 약 300여년 전에 창건한 이 서당은 1960년대까지 허씨 문중의 자손들과 마을 아이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 마을의 허남곤 전 이장은 자신이 이 서당의 마지막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허 전 이장은 “노천재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소학까지 배웠다”고 술회했다. 전동리의 마을 깊숙한 곳에 영일 정씨 문중도 있다. 이 문중의 입향조는 영오 정연탁으로 포은 정몽주의 10세손이다. 그는 노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구를 이끌고 참전했다. 부산, 울산, 병영 등지에서 크게 이기는 전공을 세웠으나 감포읍 호동리의 골짜기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후손들은 이를 기리기 위해 재실을 세워 그의 호를 따 영오정이라고 했다. 영오정 뒤쪽에는 또 그의 충성심을 간직하기 위해 충효각도 세웠다. 전동리의 허남곤 전 이장은 “추령재 너머 동경주에는 허·정·금(許·鄭·金)이라고 해서 세 문중이 가장 큰 문중이었다”며 “어일의 정씨 문중, 두산의 김씨 문중과 전동의 허씨 문중이 그것인데 그 가운데 허씨 문중이 가장 큰 문중이었다고 했다”고 말했다.그래서 전동리 주민들은 나름대로 양반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허 전 이장은 “우리 스스로 양반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감포 바닷가 사람들이 ‘전동에 사는 허씨들은 양반’이라고 칭했다”고 말했다.양반 마을의 양반 허씨들은 조상이 물려준 재실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정신적인 뿌리이면서 자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재실들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지키고 다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허남곤 전 이장은 “전동에 남아 있는 재실은 나름대로 주민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노령이어서 관리할 사람이 없는 실정”이라며 “이 마을에 살기 위해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전동리에 들어와서 생활이 안 될테니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한 마을에 유교문화를 잘 드러내는 기념물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는 매우 힘들다. 전통 민속마을로 지정돼 정부나 지자체에서 관리하지 않는 마을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전동리의 김해 허씨들과 영일 정씨들은 조상들이 살았고 그들의 정신과 향기가 가득한 재실들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 동경주의 보석과도 같은 마을로 남을 수 있게 했다.   전동리 유교문화집성촌으로 가기 위해서는 월성원자력홍보관에서 감포항 방향으로 달리다가 감포항에 이르기 전에 큰 도로를 버리고 왼쪽 전동리쪽으로 진입하면 된다. 약 14㎞ 정도의 거리에 자동차로 약 25분이 소요된다.※ 이 콘텐츠는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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