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할아버지와 훌륭한 선조들의 후광에 힘입어 사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일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함께 풍찬노숙했던 많은 독립유공선열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사회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지만 젊은이들도 본받으려고 노력해주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수 년 전부터 그 어느 때보다 영웅 안중근(1879~1910) 의사를 주제로 하는 뮤지컬, 연극, 영화, 소설 등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26일 효창공원 내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 앞에서 순국 113주년 추모식을 거행한다. 안 의사는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로, 남과 북이 유일하게 공동으로 기념하는 독립운동가기도 하다. 순국하고서도 원하는 곳에 묻히지 못한 안중근 의사.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족에겐 ‘영웅의 후손’이었지만 남겨진 그의 가족들과 후손들은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자 경계 대상일 뿐이었다. 숱한 탄압에 풍비박산 난 안 의사의 집안 가족과 후손들은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감시를 받았다.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홍근(1881~1928) 선생도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은 1918년 4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했고 같은해 8월말 독립운동단체의 일원으로 적위군과 함께 이만 전투에 참여해 일본군과 교전했다. 안홍근 선생은 이만에서 퇴각할 때 일본군만 보이면 “나의 형 안중근과 명근의 원수를 갚겠다”며 대오에서 뛰어나갔다고 전해진다. 또 1918년 9월 크라스나야 레치카역에서 다른 동지들과 중국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3명을 체포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192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수청촌에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해 전달한 공적 등을 인정받아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이로써 안 의사 가문은 그동안 안중근 의사(대한민국장)를 비롯해 청산리 전투와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인 안 의사의 남동생 정근(독립장), 일제강점기 안악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촌동생 안명근(독립장), 사촌 동생 안홍근(애족장), 안춘생(독립장), 최익형(독립장), 안경근(독립장), 안정근(독립장), 안봉생(애국장), 오항선(애국장), 조순옥(애국장), 안원생(애족장), 안공근(독립장), 안낙생(애족장), 조성녀(애족장), 안태순(애족장) 선생 등 모두 15인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안중근 의사의 혈족 중 한 분인 안기분(83) 여사를 경주성건성당에서 만났다. 안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홍근 선생의 친손녀이자 안덕생 선생의 따님으로 만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경주 성건동에 살고 있는 안 여사는 시종 겸손한 모습으로 안중근 의사와 조부인 안홍근 선생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성건성당에서는 최근 개봉된 영화 ‘영웅’을 안 여사와 함께 단체 관람했다고 한다.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의사 할아버지(안 여사는 안중근 의사를 이렇게 불렀다) 스토리와 함께 고생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교차돼 더 눈물이 났어요. 예전에도 할아버지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났거든요”“짧은 생애에 구국의 사명감으로 의거를 하신 의사 할아버지께서는 철학적으로나, 인품으로나 모든 방면에서 훌륭하신 분이잖아요. 제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한 가지는, 이토 저격 후 총 알 한 발이 남았음에도 자결하지 않고 떳떳하게 잡혀간 것은 세계 평화를 알리기 위해서 그 한 발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안기분 여사는 대구서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경주에서 52년째 살고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이후, 가족들은 대부분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만주로 피난 갔고 안 여사는 세 살 때 해방을 맞이하고 부모님을 따라 임진각을 건너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한다.안 여사는 “집안에 한 사람이 독립운동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의사 할아버지와 함께 형제들과 사촌들이 다 같이 거들어서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그분 의거 이후, 일제의 핍박과 감시로 고향 황해도에서는 살 수 없어서 자손들이 미국 등지로 다 흩어졌고요. 제대로 집안을 꾸리지 못했어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초가 심했어요. 의사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들은 한국 사는 자손들이 거의 없어요”라며 후손들의 피할 수 없었던 고초에 대해 말했다. “우리 삼촌 한 분도 누가 잠깐 만나자 했는데 이후 소식 없고 막내 삼촌도 중국 간다고 한 이후 연락이 끊기는 등 말없이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는 분들도 많았고 행방불명 된 후손도 많았어요” 안 여사의 부모도 고향을 떠나 조선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만주 ‘석목천’이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당도 있었던 아주 큰 동네에서 부친 안덕생 선생은 촌장이자 성당 회장을 맡아 ‘맨날 총을 옆에 차고’ 독립운동 활동 군자금을 전달하고 수합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어머니는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러 오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맨날 밥 짓는 일’을 하셨지요. 부모님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부지런한 부친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무지막지한 중국 마적단 떼들이 한 번씩 오면 타협해서 돈을 주기도 했지만 협상이 원활하지 않으면 그들은 마을 사람을 죽이고 가기도 해서 성당 지하실에 주민들이 숨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고 임진강을 넘어 월남한 안 여사의 가족은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마련해준 서울 쌍문동 적산가옥에 정착하게 된다. “김구 선생은 생필품을 지급받을 수 있는 배급소를 하나 주셨어요. 그래서 당시엔 생활이 조금 나아졌고요. 김구 선생이 1949년 돌아가셨는데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께서 한달음에 달려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안 여사가 8세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대구로 피난 온 후 부친은 작고한다. 매년 3월 26일 안 의사 순국일과 2월 24일 사형선고일, 10월 26일 이토를 저격한 날이면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는 후손인 안 여사에게 안내 엽서를 보내온다. 안 여사는 “최근엔 숭모회에서 할아버지 유해가 발견될 때를 대비해 유전자DNA 검사를 하고 갔습니다”라고 했다. 안 여사에게도 5~6년 전부터는 경주남부보훈지청에서 소정의 보상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안 여사는 “여든 넘어서 마지막 가족 대상자인 손녀라고 지급해주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보상금을 비롯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일 년에 몇 차례씩 연락이 오는 등 유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선조들의 독립운동 활동들이 그전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의사 할아버지와 조부, 아버지도 모두 그렇게 돌아가셔서 눈물이 나곤 했지요. 이렇게 조명을 받는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 선열의 명예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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