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밥상머리 교육은 현대와 현저히 달랐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과 또한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내용이 주류였다. 요즘은 어떤가. 경쟁에서 이기는 일은 물론, 공부 잘해야 좋은 대학도 가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학과 선택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이 대부분인 게 사실 아닌가.  하지만 당시엔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보다는 말 한마디라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게 발설할 것을 주지 시켰다. 이런 가정교육은 비단 우리 집 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부모님들은 타인에게 해코지를 하면 그것은 곧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어왔다. 무엇보다 인간 마음의 거울인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을 덕목으로 여겨 이를 누누이 자식들에게 강조하기도 했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법도(法道)가 바로선 교육을 받은 덕분인가보다. 요즘도 타인의 눈을 가리거나, 그릇된 언행으로 남을 해코지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사람다운 면모는 무엇보다 언행에서 엿볼 수 있다. 언행은 사람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니던가. 언행만으로도 대략 상대방 인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게 이 때문 일 것이다.  이즈막 뉴스 대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돈이란 누구나 피땀 흘려 버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의 주머니를 그럴싸한 명분으로 털어 내 욕심 보따리를 채우는 일들이 언론을 도배하기 일쑤여서다. 비근한 예로 전세 사기가 그것이다. 최근 신조어로써 `빌라 왕`이라는 말이 회자 되고 있다. 이 말은 남의 피 같은 돈을 악용하여 수십 채 심지어 수백 채의 집을 구입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렇게 타인 재물로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느라 보증금을 갈취 하는 게 전세 사기 아니던가. 이 범죄로 말미암아 그 피해는 세입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 것이다.  한탕주의에 의하여 힘 안들이고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폐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그 사이 3명이나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전세 사기 피해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앞길이 막막하면 견디다 못하여 귀한 생명을 저버렸을까? 그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며칠 전엔 한창 앞날이 창창한 30대 젊은 여성이 전세 사기 피해로 인하여 생을 마쳤잖은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몬 사기꾼들은 기본적 양심은 물론, 사회적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들이다.  어느 문헌에 의하면 예로부터 남의 눈속임을 일삼는 사기꾼에게도 기도(欺道)는 있었다고 한다. 소위 사기꾼에게도 자기네들 끼리 통하는 예는 있었나보다.  소위 그 기도에 의하면, 남을 속이고자 할 때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예(禮)요, 상대를 속이다가 술수가 들통 나면 과감히 무릎 꿇는 것이 용(勇)이며, 속이다가 별반 얻은 것이 없으면 상대방에게 열심히 돈 벌라고 훈계하는 게 지(智)란다. 홀아비 및 과부 등 외로운 사람은 사기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인(仁)이며, 우환을 겪고 있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의(義)로 삼았단다. 이 다섯 가지 사기꾼이 지켜야 할 기도의 덕목 앞에 절로 입맛이 씁쓸하다.  현대는 그야말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부르짖으면 시대에 뒤떨어져 썩은 동아줄을 붙잡는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는 세태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선 편법은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삭빠르게 자신의 밥그릇 챙기는 자가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나 할까. 사실 원칙과 의, 정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 보는 세태 아니던가.  아무리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과속 질주하고 도덕과 윤리가 변질되어 본질을 잃었기로서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이 때 조상들이 남긴 교훈이 문득 생각난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신의 눈엔 피눈물 난다는 말도 있잖은가. 내 것이 귀하면 타인의 티끌도 천금처럼 소중하기에 오늘 빌라 왕들에게 쓴 소리 한마디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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