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벼랑 끝 나무 끝에 한 손으로 매달려 죽을 위험에 처해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벌집의 꿀맛에 행복해 하는 것이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다.
소년에게 타인의 죽음은 남의 일일 뿐이다. 청년이 되면 죽음은 알지만 그러나 먼 훗날의 일일뿐이라 생각하기에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부푼 꿈을 가진다. 중년이 되면 인생이 너무 분주하여 잠시 죽음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삶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노년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남은 삶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스님이 절친했던 연하((年下) 도반(道伴)의 무덤 앞에 서서 중얼 대기를 "이놈아, 나는 니가 태어났을 때 이미 이리 될 줄을 알았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이 예고된다. 그러나 다만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를 모를 뿐이다.
한 가지 소원을 묻는 `알렉산더대왕`에게, 지금 가리고 있는 그 따스한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유명하지만, 그 얘기에 모두가 공감하지는 않을 터이다.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생활을 실천하며 천수(天壽)를 누린 디오게네스와 천하를 얻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정복 전쟁을 계속하다가 불과 33세의 나이에 요절한 알렉산더, 어느 삶이 더 나은 삶인가는 여러분들의 판단이겠지만, 배부른 진수성찬과 시장한 박찬(薄饌)의 미각을 비교할 필요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쌓고 또 쌓아도 남은 것이 없으며, 가지고 또 가져도 결국엔 버릴 것들 밖에 없으니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라 하나, 욕망은 이성의 지배를 거부한다.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 해도 천 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가오지 않을 미래 때문에 오늘이 고달픈 줄을 모른다.
사치스러운 양심 때문에 가난한 사람도 있지만, 더러운 비양심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찬과 박찬에 대한 미각의 우열을 논하기 어렵듯이, 행불행(幸不幸)은 대체로 소유의 량과 무관하다 해도 사람들은 절대로 믿으려 들지 않을 것 같다.
한 남자가 호기롭게 말한다. 가늘고 길게 사느니 나는 굵고 짧게 살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굵고 짧게 사는 것 보다야 기왕이면 굵고 길게 사는 게 더 좋을 듯한데, 문제는 어떤 삶이 가는 것이며 어떤 삶이 굵은 삶인지 기준이 모호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 가면, 그 짧고 긴 것조차도 큰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지는데, 백 년과 천 년을 비교하면 그나마 좀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오십년과 육십년 혹은 구십년과 백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유를 모른 채 태어나서, 이유를 모르고 살다가, 이유를 모른 채 어느 날 가는 것이 인생인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 또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다. 답이 없는 답을 찾고자 숱한 구도자들이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없는 것을 찾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여전히 없는 것을 찾으려는 구도자(?)가 넘쳐난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즉, 구하지 말고 찾지 않으면 구족(具足)할 것이니 권력이든 재물이든 사랑이든 심지어 삶에 대한 집착마저 끊어지는 순간, 모든 의문 또한 덧없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생의 시작이지만, 저녁에 눈을 감으면 하루의 삶이 마감된다. 짧은 잠을 지속하다가 긴 잠에 빠져들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죽음은 불행이라고? 그런데 깊은 잠에 빠진 당신이 그 불행을 느낄 수가 있을는지 몰라….(어느 지인의 죽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