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은 아직 더위의 기세가 남아 있어도 밤중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낮에 열어두었던 창과 문을 닫게 되는 걸 보니 유난히 뜨겁던 여름도 시간의 힘에 밀려나고 가을이 자리를 찾아 제 구실을 하나 봅니다. 그렇게 가을이 시작되었는데 며칠 동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을장마라고 합니다. 리비아의 대홍수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번 여름 수많은 인명이 죽고 다치는 수해를 입었기에 사망자만 근 2만 명을 넘길 것이라는 리비아 홍수 피해가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에는 경계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외무물(身外無物)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몸이 가장 귀하다는 의미입니다. 비슷한 경구로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체육선생님께 많이 듣던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세상살이의 경험이 일천했던 십대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거저 주어져서 시간이 가면 스러져 버릴 몸이 오래 기억될 고귀한 정신과 어떻게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을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당시 체력장이라는 항목으로 신체적 기능이 점수화되어 고등학교 입시 시험에 반영되었기에, 체육시간만 되면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키시던 체육선생님에게 반발하던 마음이 내뱉은 불평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하나씩 지병이 늘어나면서 자꾸 움츠러드는 내 마음을 대하면서 ‘신외무물’,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이런 경구의 의미를 이제는 고개 끄덕이며 깊이 공감하는 자신을 봅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경구는 원래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 속의 한 소절이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신체의 강건함만을 추구하고 정신적인 단련은 소홀히 하는 풍조를 비판하는 풍자시였다고 합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몸짱’ 열풍처럼 아마 그 시대의 로마인들도 젊고 강건한 아름다운 육체라는 외면적 가치를 우선시하여 신체를 닦달하는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유베날리스의 의도와 달리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이 말의 본뜻을 뒤집어서 사용했습니다.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 슬로건으로 이 경구를 내세웠습니다. 계몽철학자 존 로크도 아이들을 교육할 때 건강한 육체의 소중함부터 먼저 가르치자는 교육론을 펼칩니다.    이에 비해 전통적인 동양의 가르침은 몸의 세계보다 정신의 세계에 더 가치를 두었습니다. 유교 경전인 「대학」에 ‘심정이후수신(心正而後修身)’, 즉 마음을 바르게 한 후에 몸을 수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후에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점층적인 세계관을 공부의 목표로 삼게 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논리는 차치하고 어찌 되었든 몸과 마음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최근 야당 대표의 단식이 연일 언론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 전에도 간간이 단식으로 정치적 이슈를 강하게 어필한 정치인이 더러 있었지만, 먼저 경험한 그들이 말하기를 장기간의 단식은 이후에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려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더라고 합니다.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한 시위입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초래했다던 사회적 신드롬이 떠오릅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괴로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소설 속 인물을 모방한 독자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따르던 유명인의 자살에 심리적으로 동조하여 이를 모방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유명 인사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뒤에 그들의 팬이나 추종자들이 같은 운명을 선택했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명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칫 생명을 담보로 한 협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로 인한 베르테르 효과,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논쟁보다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잘못된 방법을 모방할 젊은이들이 생겨날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요구를 위해 생명을 담보 잡혀서는 안 됩니다. ‘신외무물’이라는 경구가 함축하는, 다른 어떤 무엇보다 자신의 몸이 귀하다는 것을 그가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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