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에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증상을 우리는 불감증(不感症)이라 한다. 한센병 환자들이 특정 부위에 감각을 상실하여 뜨거운 물건을 만지다가 화상을 입는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불의한 일을 보고도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불의한 일에 자신이 화상(火傷)을 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의한 일에 분노를 느끼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불의를 방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기심의 활성화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와 결탁하는 경우도 있다.
 
사법은 범죄 방조 역시 범죄로 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내 곁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을 보고도 외면한 사람에 대해 도덕적 비판은 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법적 처벌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불의를 방조하거나 불의와 결탁한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차치하고, 그러한 행위 자체에 대해 감정이 없기에, 분노조차 느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불의(不義) 불감증(不感症) 환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굳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의 불감증 환자가 계속 늘어나는 사회는 결코 존속되지 않을 것인데, 일예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의 SS 대원들이 이유 없이 유대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이웃 유대인들은 창문너머 광경이 내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자기 집 창문을 닫았지만, 결국엔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유럽에서 유대인 사회는 사라지고 만다. 한 때 성행했던 하이재킹 범죄, 대형 항공기에는 수 백 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지만, 무기를 손에 든 불과 한 두 명의 괴한들이 항공기를 납치하고 수 백 명의 승객은 인질이 되어, 비행기는 지정된 항로를 이탈하게 되는데, 이 때 승객들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무기를 소지한 범인들을 탑승시킨 공항 시큐어리티 시스템은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당장 납치된 항공기의 안전 책임자와 승객들이 위험을 감수하며 범인들을 제압하는 것이 우선인지? 아니면 범인들을 탑승케 한 공항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우선인지? 음주 운전자와 동승한 사람에 대해 방조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는 불의에 대한 소극적 방조조차 불의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제야말로 불의를 적극적으로 방조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 지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여기서 불의와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것 같지만, 내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위록지마(謂鹿止馬), 사슴(鹿)을 사슴이라 하고, 말(馬)을 말이라 아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법도 아닐 것인데, 사슴을 말이라 우기며 그것을 과연 생각의 차이라 논란(論難)할 수 있을까? ‘불의 불감증’이란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증세이기에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생명체들을 우리는 짐승이라 해야 할지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불의를 보고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바로 우리 사회의 불의 방조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은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자괴감을 마땅히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찾지 못해 앙앙불락하며 그만 절필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