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박물관 전시실에는 서기 6세기경 신라인들의 책임시공을 맹세한 ‘남산성비’와 화랑들의 애국정신을 맹세한 ‘임신서기석’등 두 점의 금석문이 전시돼 있다. 이 두 점의 신라금석문은 삼국통일전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1934~1935년은 석당 최남주(1905~1980)에 의해 경주에서 신라 금석문 두 점이 연달아 발견된 해다. 6세기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세기적인 발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첫 번째 발견은 1934년 10월 31일 경주남산 식혜곡에서 발견한 신라남산신성비다. 서기 591년 신라 진평왕 13년 신해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높이 91cm 넓이 44cm 자연석 화강암에 치석 되어 고졸한 육조풍의 서체로 음각된 비석이다.   이 비가 만약 이렇게 크지 않고 작았다면 공동 발견자인 오사카긴타로(大坂金太郞, 1877~1974, 경주박물관장 역임)는 자기 개인소장으로 날조해 일본으로 반출할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남산신성비 발견 보도는 당시 경성일보 1934년 11월 5일자(일어판)에 중간 톱기사로 경주박물관장 오사카와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최남주 공동발견으로 비중있게 제일 먼저 보도가 되었다. 그 후 오사카는 자신이 남산신성비를 발견했다는 존재증명을 하기 위해 ‘조선25(1934)’에 남산신성비 발견 경위를 자신의 공적 위주로 발표하였다.   한편 일본식민지관학파의 신라사연구 대가인 후지다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 조선총동부박물관장 역임)는 1935년 3월‘청구학총’ 제19호에 ‘조선금석소담’이란 제목으로 남산신성비의 발견을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금석문으로 높이 평가를 하였다. 이 논문에는 최초 발견자인 최남주가 조선인이란 이유로 아예 이름조차 빼고 오사카가 발견자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 오사카긴타로가 주장하는 ‘임신서기석’ 발견 경위일제강점기 오사카긴타로의 왜곡된 증언과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1904~1992, 경성제대 교수역임)의 논문기록을 토대로 한 ‘임신서기석’의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4년 5월 4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인 오사카긴타로가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를 조사하던 중 오사카의 발에 문득 돌 하나가 걸려서 자세히 보니 냇돌(川石 길이 30cm)에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 내용이 계속해서 한일학자들 논문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임신서기석 발견자가 오사카긴타로가 된 것이다. 만약 오사카가 1934년 ‘임신서기석’을 발견했다면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신문에서도 그의 발견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임신서기석’에 대한 어느 사학도의 기록1959년 9월 21일 ‘중대학보’에 당시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허웅이란 사학도가 ‘화랑도유물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란 기고문을 통해 임신서기석의 최초 발견자는 최남주라고 발견 경위를 기고하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경주향토사학자 최남주 씨 댁에 묵으면서 여러 가지 화랑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중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이 여기 소개하는 ‘화랑서기석(임신서기석)’ 이야기였다.   이돌(임신서기석)은 지금부터 24년 전 단기4268년(1935년) 경주 금장리 석장사 부근에서 공사중 출토되어 바로 최남주씨의 손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35년 공사중에 발견되었다는 최남주의 증언이다. 이 부분이 오사카의 석장사 답사 중 발견하였다는 증언과는 다른 부분이다.   또한 석당 최남주는 분명히 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의 자체(字體)와 ‘임신서기석’이 같다고 밝히고 있어 발견 시기도 오사카의 1934년과는 차이가 난다. 석당 최남주는 소년시절 경주의 대유학자 김계사(김범부 스승)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보성고보시절 은사 황의돈 선생(민족사학자)으로부터 고대 금석문강독법을 배웠다.   오히려 오사카보다 금석문 해독실력이 뛰어났다. 다만 정규홍 선생(우리문화재 수난사연구가)의 지적처럼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는 보고서나 논문발표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석당 최남주는 자신이 발견한 신라금석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다음은 석당의 ‘임신서기석’에 관한 회고담이다. 1935년 봄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 부근에서 농수로 공사로 인해 신라시대 와당들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천수답 경사 언덕 맨 아래쪽에서 ‘남산신성비’처럼 생긴 작은 강돌이 최남주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보니 앞면이 치석되어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란 글자체가 음각되어 있었다. 또 중간에 3년이란 맹세문장이 씌여져 있어 직감적으로 작년에 발견한 ‘남산신성비’ 문장체제와 같다고 확신했다. 이튿날 이 비석을 가지고 관장인 오사카에게 보이니 그는 첫눈에 가짜라고 단정하고 유물수장고에 방치해버렸다. 1935년 12월 18일 스에마츠 야스카츠가 경주박물관 방문시 이 비석의 가치를 어느 학자보다 먼저 알아보고 1936년 ‘경성제대 사학지 제10’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란 논문을 통해 발견자가 오사카 긴타로라고 소개하였다.   그후 오사카는 임신서기석을 자기 개인 소장품으로 둔갑시켜 오동나무상자에 넣어 박물관장실에 보물처럼 보관하였다. 그는 8.15이후 9월에 도망치다시피 ‘임신서기석’을 챙기지 못하고 자기 집에 보관중인 신라유물들만 챙겨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1960년대 이후 오사카는 석당에게 편지로 ‘임신서기석’의 안부를 물어왔다. 석당은 정부 수립 후 오사카의 이러한 파렴치한 만행을 밝힐 수 있었으나 신라 화랑의 보물인 임신서기석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고 경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있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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