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가면 조선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1548~1631)의 묘가 있다. 그는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우리는 흔히 유학하면 이 율곡과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경기 전라를 아우르며 논산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가 또한 있어 이 둘은 조선 유학의 근본 뿌리가 된다.    기호학파의 중심에 선 인물이 김장생이고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선조 11년(1578) 학행으로 천거되어 늦은 나이에 창릉참봉·현감을 지냈으며 후일의 관직은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다. 1582년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 김계휘가 상을 당하자 조선예학의 거두답게 3년 상을 치루면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고 아울러 초막을 지어 무덤을 지키며 시묘살이를 했다. 선조 17년(1584년) 스승 율곡 이이의 상을 접하였지만 김장생은 아버지의 3년 상으로 시묘살이 중이었으나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고 이러한 정성은 스승 송익필의 상을 당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3년 상을 마치고 다시 남양부사, 안성군수를 거치고 1600년에는 유성룡의 천거로 청백리에도 뽑혔다. 1613년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스승 송익필과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향리로 내려가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1631년 향년 83세로 세상을 뜨니 조정에서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하였고 그의 장례식에는 문하생과 선비 등 1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경서판의』,『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송강행록』,『사계유고(沙溪有故)』등이 있다.    그는 아들 김집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사람으로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부자간 두 명이나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조선 최고의 명문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본관인 광산김씨는 조선시대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대구의 달성서씨, 연안이씨와 더불어 조선 3대 명문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이곳의 산세는 금남정맥 함박봉(404m)에서 서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내어 매봉(146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서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논산저수지를 앞두고 이 묘역의 주산인 고정산(145m)을 일으킨다. 고정산의 원줄기는 계백장군 유적지가 있는 충장산쪽 서북방으로 뻗어나가니 이 혈장을 완전히 감싸주고 있다. 주산에서 혈장으로 뻗어 내린 용맥은 양쪽으로 분맥을 하고 여기서 왼쪽자락의 용진처에 광산김씨의 가문을 중흥시킨 그의 7대 조모 양천허씨 묘가 있고 그 위에 김장생의 묘가 있으니 역장으로 쓰여 져 있다. 조선조에는 요즘과 달리 유명인 집안에서 역장을 많이 사용했으니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 우측능선에는 그의 6대조이신 김철산의 내외분을 비롯한 4기의 묘가 있다. 묘역 좌우 청룡과 백호는 겹겹으로 감싸주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묘소 앞 수구도 관쇄되어 혈장에 많은 생기를 가두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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